◆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 미치광이 살인마로 묘사된 사도세자
영조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계승자 사도세자를 제거한 것에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엎치락 뒤치락하는 각 당파의 당쟁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맥락을 거세하고 '사도세자가 죽을 만한 짓, 죽어 마땅한 짓'들을 저질러서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수 밖에 없었다며 가해자를 변호하는 얘기들이 있다.
세자가 죽은 뒤에, 사실은 세자가 반란을 준비했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세자가 만들었다는 토굴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무기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세자가 대궐 주변 상인들에게서 돈을 빌려서 영조가 대신 갚아주었다고도 한다. 정신이 분열된 상태에서 세자가 환관과 궁녀들을 마구 잡이로 살해한 살인마 였다는 얘기도 있다. 이 모든 얘기들은 세자가 죽을 짓들을 해서 영조가 선택의 여지 없이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 논리들은 전형적으로 가해자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논리일 뿐이다. 토굴에서 나온 무기와 환관과 궁녀들을 죽였다는 기록은 반대로 세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이 얼마나 세자 제거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토굴의 무기들은 세자를 제거하려는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한 세자의 자구책이었고, 세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환관과 궁녀는 세자를 모함하고 염탐하는 세력들이 침투시킨 간첩들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세자가 민간에서 돈을 빌려 영조가 갚아줬다는 것이 세자의 인격이 개차반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곤 하는데, 그 또한 사실과 다르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었을 때도 옹주가 민간에게 졌던 외상을 갚아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들은 모두 세자 살해에 가담한 측들에 의해 유포된 얘기들인데, 이런 종류의 분야에서 선두에 있는 것이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환청과 환시를 겪을 정도의 정신분열 정신착란 상태였다고 썼다. 혜경궁 홍씨가 쓴 이 책 '한중록'이 조선시대 한국어인 국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주로 조선시대 한국어를 연구하는 국문학과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모욕과 험담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혜경궁 홍씨는 정신이 미친 남편을 불가항력으로 잃고 험한 세월을 견디며 이겨온 불운하나 역경을 이긴 지고지순의 드라마틱한 궁중 여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한중록'을 근거로 심지어 2015년에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가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다. 역사적 사건에 각 자의 주관을 곁들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탓할 순 없지만, 적어도 '한중록'이라는 기록은 가해자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것을 환기할 필요는 있다.
'한중록'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조 사망 후에 쓴 부분이다. 혜경궁 홍씨가 정조 사망후에 쓴 부분은 손자인 순조에게 자신의 친정인 홍씨 집안을 복권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영조 사망 후 즉위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세력들 중 일부를 숙청했는데, 그 중에 홍씨 집안이 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순조에게 순조가 몰랐던 얘기들을 알려주겠다면서 쓴 부분이 사도세자에 대한 험담이었다. 만약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끝끝내 손자에게 알려주지 말았어야 할 얘기 아닌가.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정신병자이고 살인자였다고 고자질하는 할머니라니, 이것이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의 '금등지사'(金縢之詞), 아버지를 죽인 세력을 다루기 위한 협상카드
'금등'이란 고대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금속으로 봉한 상자라는 뜻이다. 고대 주나라 무왕이 중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을 때 무왕의 동생 주공은 자신이 무왕 대신 죽겠다는 기도를 하고 기도문을 써서 금등에 넣어두었다. 후에 무왕이 죽고 무왕의 아들 성왕이 즉위를 했는데, 나이가 어려 주공이 섭정을 했다. 그런데 주공은 무왕을 독살했다는 모함을 받고 낙양으로 피신한다. 그러던 중 성왕이 주공의 금등을 발견하여 주공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금등에 얽힌 이야기를 '금등지사'라고 한다.
이러한 고대 주나라의 금등지사가 조선에서 영조의 금등지사로 재탄생한다. 내용은 이렇다. 영조가 아들을 죽인 후에 사도세자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고, 그래서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다고 쓴 글을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 간수해놓았다는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17년 8월 8일 기사에는 정조가 영조의 금등지사를 적은 종이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정조가 대신들에게 보여준 영조의 금등지사는 영조가 직접 쓴 원본이 아니다. 정조의 말에 의하면 정조가 영조가 쓴 원본을 보고 원본에 있는 글귀들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조가 정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글귀들을 썼는지는 정조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신들은 왕인 정조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후 정계 개편을 위해 숙종때 실각한 이후로 정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남인들을 키웠다. 정조의 지지세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오랜 과정을 거쳐 정조 17년 5월 25일에 남인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채제공이 영의정으로 임명된 지 사흘만인 5월 28일에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고 정조는 진노하며 채제공에게 상소를 돌려주며 무마하려고 했지만,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채제공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자. 정조는 일단 채제공을 파직시킨 후에 노론 벽파들을 진정시켰다.
임오화변 이후 노론은 다시 크게는 벽파와 시파로 갈라진다. 벽파(僻派)에서 '벽'(僻)은 임금 벽이고 그 임금은 영조를 말한다. 즉, 벽파란 진짜 영조편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몸통은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였다. 따라서 '벽파'란 영조가 아들을 죽이는 것을 부추기고 위대한 결단을 내린것이라고 칭송하는 당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시파(時派)는 벽파 입장에서는 시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입장을 바꾸는 일종의 기회주의와 같은 행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벽파에 비해 시파는 당연히 사도세자에게 더 온정적이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정치적 기반인 벽파와 손을 잡고 즉위했다. 사도세자 사후에 영조는 정조를 일찍 죽은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의 법적 아들로 입적시켜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신분을 세탁해주었다. 정조가 벽파를 배신한다는 것은 할아버지 영조를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벽파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즉, 벽파를 집권 세력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동시에 스스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이랬기 떄문에 정조는 즉위후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모든 상소를 내치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모두 귀양보내는 등의 처벌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정조가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은 채제공을 파직시켰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노론 벽파들의 원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조 17년 8월 8일의 기록에는 채제공이 도승지 시절에 영조가 채제공만 불러서 비밀리에 어서(御書) 한통을 주고 간직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이미 영조가 썼다는 금등지사의 글귀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정조가 보고 베꼈다는 금등지사 글귀들을 대신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정조가 말하길, 채제공이 선왕의 숨은 뜻을 혼자 알고 있었고, 이제 영의정이 되었으니 선왕의 뜻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이기 때문에 상소를 올린 것이라며 정조는 채제공을 감싼다. 이렇게 정조는 채제공에게 파직 이외에 더 큰 처벌을 해야 한다는 노론 벽파들의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이다.
정조가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은 정조의 통치 기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하면서 즉위했는데, 이것은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에게 그 죄를 묻지 않겠으니 정조가 추진하고자 하는 여러 개혁 정책들에 협조하라는 정치적인 메시지였다. 사람된 도리로 친부인 사도세자를 추승하고 제사를 지낼 것이니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정조가 추진하는 왕권 강화 개혁정책들에 협조를 하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가기 위해 음모와 협잡을 벌였던 너희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금등지사도 그런 의미로 거론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11세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인 일들을 정치적인 반역죄로 몰고가는 일을 하지 않겠으니, 너희들도 왕의 일에 협조해라'라고 하는 이런 금등지사 카드가 노론 벽파들에게 잘 먹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조가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지간을 이간질하여 최악으로 몰고간 세력들의 면면과 그 행위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조는 11세 이후 24세에 즉위하기 까지 또 즉위한 후에도 숫한 암살 시도와 위협을 겪었다. 정조 16년 5월 22일자 기록을 보면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을 정조는'피맺힌 원수'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세자를 수원 화성으로 이장할 때 정조는 부친의 묘를 맨손으로 끌어안고 울었는데 실록에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 죽였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세력을 처벌하지도 못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국사를 논하고 개혁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이 정조였다.
조선 전기의 성군이 세종대왕이라면 조선후기의 성군은 정조대왕이다. 만약 정조가 50도 채 안된 48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고, 추진하던 각 종 개혁정책들을 완수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는 그 해에 정조가 죽고 조선은 바로 이른바 몇몇의 권문세가들이 정권을 잡고 휘두르는 공정과 상식, 원칙이 사라진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정조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관계되어 있는지는 각 자의 판단 영역이지만, 최소한 정조의 죽음으로 거대한 이권을 챙기고 조선을 망하게 하는 쪽으로 가게 만든 세력들과 그 세력들을 옹호하는 논조로 연구하는 학계가 정조의 죽음을 두고 왈가부가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가 없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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