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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12>세검정 빨래터, 여행자의 시선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권섭(1671~1759),
권섭(1671~1759), '세검정(洗劍亭)', 종이에 담채, 41.7×25.7㎝, 개인 소장

숙종~영조 때 문인 옥소(玉所) 권섭은 본가, 외가, 처가가 모두 쟁쟁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르침을 받은 큰아버지 수암(遂菴) 권상하는 이이에서 송시열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계승자로 송시열 임종 시에 의복과 책을 물려받은 수제자다. 외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세백이고, 외삼촌은 영의정 이의현, 함께 면학한 처남 이태좌는 좌의정을 지낸다.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을 텐데 권섭은 벼슬길이 아니라 여행과 문예를 택했다. 구십 평생 전국을 여행하며 보고 겪은 바를 시, 시조, 가사, 여행기인 유행록(遊行錄), 꿈 이야기인 기몽설(記夢說) 등 글로 남겼다. 그림에 취미가 돈독해 100여 수의 제화시를 비롯해 화가와 작품에 대한 내용도 문집에 많이 실려 있다.

권섭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패주 조세걸 등 대가들과 교유하며 이들의 작품을 소장했다. 여행가답게 정선의 진경산수를 가장 좋아해 '당세일인(當世一人)'으로 정선을 꼽았다. 손자 권신응(1728-1786)에게 그림 공부를 시키며 교재로 쓰기 위해 정선에게 부탁해 '악해첩(嶽海帖)' 9점을 그려 받기도 했다. 권섭이 70대 중반인 만년이었고 손자 권신응은 10대일 때였다.

17~18세기의 시대정신은 국토와 현실의 발견이었다. 우리 산천을 여행하며 직접 본 경치와 경험한 풍물, 풍속을 글로 지었고 그림으로 그렸다. 정선의 후원자이자 스승인 김창흡은 금강산을 13번 다녀왔을 정도다. 권섭의 주위에는 당대의 명사인 김창흡과 형제들, 백부 권상하, 아우 권영 등 그림 애호가가 많았다. 주류사회에서 문화와 예술이 피어난 시기였다. 권섭은 서울의 양반사대부들 사이에 일어난 산수유람, 문학과 그림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세검정'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써넣은 이 작품은 권섭이 82세 때 그린 '한양진경도첩' 10점 중 한 점이다. 세검정은 한양도성에서 멀지않은 수석(水石) 명소였다. 기단부 없이 계곡 바위 위에 바로 세운 돌기둥, 삼면이 돌출한 구조인 정(丁)자형 지붕, 담장을 두른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오른쪽 위로 멀리 한양성곽으로 둘러싸인 백악산을 그려 넣고 '백악(白岳)'으로 표시해뒀고, 왼쪽 언덕 위 소나무 사이엔 '탕춘대(蕩春臺)'로 지명을 써 놓아 세검정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등장인물이 12명이나 된다. 도성 밖으로 먼 길을 나선 말 탄 나그네, 너럭바위의 유람객, 방망이를 두드리며 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성들이다. 정선의 화풍을 따라 명승명소를 그린 진경산수이나 여행자의 시선이라 그 장소의 지리와 풍물까지 빠트리지 않았다.

세검정은 정선, 전 김홍도, 유숙, 전 조정규, 이도영, 야스다 한포 등의 그림이 전하지만 아무도 권섭처럼 빨래터로 그리지 않았다. 권섭의 '세검정'은 여행자의 덤덤한 시선이 담긴 이례적인 세검정도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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