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가(MASGA). '미국 조선업을 되살린다'. 미국과 무역 파고를 넘을 최종병기로 조선업이 주목받는다. 선박 건조는 군사적 맥락의 제해권 장악은 물론 경제 패권과도 뗄 수 없다. 해양 무역으로 얻은 이익은 문화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8월에 종종 올라오는 태풍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은 하멜의 고국, 네덜란드의 해양 개척사를 살펴본다.
◆19세기 네덜란드 낭만주의 명작 [바위 해안의 난파선]
풍차와 꽃의 나라? 낭만적인 상징에 가린 척박한 풍토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으로 가보자. 스테인드글라스와 첨탑(尖塔)의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건물에서 압도적인 위용이 풍겨 나온다. 1885년 완공된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네덜란드 대표 화가 렘브란트의 [야경(1642년, Night Watch, 원제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시민군')] 이 기다린다.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극적 서사에 바로크 미술의 정수를 맛본다.
![[바위 해안의 난파선(1837년)]. 바이난트 뇌이언. 19세기 네덜란드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자연 앞에 한없이 미약한 인간을 격정적으로 묘사했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https://www.imaeil.com/photos/2025/08/24/2025082412521980282_l.jpg)
렘브란트의 대작을 지나면 19세기 네덜란드 낭만주의를 대표한 26살 요절 화가 바이난트 뇌이언의 [바위 해안의 난파선(1837년)]과 마주친다. 먹구름이 거칠게 뒤덮인 하늘 아래 난파선이 널브러졌다. 가파른 절벽에 자연의 압도적 힘이 스몄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필사적으로 기어 나온다. 자연 앞에 한없이 미약한 인간을 그렸다는 미술관 측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1653년 제주 삼방산 기슭 해안에 하멜 표류
그림 속 난파의 비극이 실제 사건으로 펼쳐진 제주도로 가보자. 추사 김정희가 정쟁에 휘말려 54살이던 1840년부터 1848년 60대 중반까지 귀양살이하던 대정읍. 삼방산 아래 바닷가에 배 한 척이 우뚝 솟았다. '하멜'이라고 적힌 배는 1653년 이곳에 표류한 배를 복제했다. 조선왕조 효종실록 4년(1653년) 8월 7일(양력 9월 16일)자 기사로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자.

"제주 목사 이원진이 급히 아뢰었다. 배 한 척이 난파되어 바닷가에 걸렸기에, 대정 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살펴보게 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배는 뒤집혔으나 38명이 살아남았다. 말은 통하지 않고, 글자도 달랐다. 푸른 눈에 오똑한 코, 누런 머리에 짧은 수염이었다..."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다.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나가사키로 가다 난파
하멜이 속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보고서와 하멜이 네덜란드로 돌아가 1668년 펴낸 『하멜 표류기, 원제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일지(Journael van de Ongeluckige Voyage van het Jacht de Sperwer)'』에 자세한 정황이 묘사된다. 배 이름은 '스페르베르(Sperwer)'. 표류 날짜는 1653년 8월 16일, 이원진은 한 달 뒤 조정에 장계를 올린 거다.
하멜은 1653년 6월 14일 네덜란드 북부 테헐(Texel) 항을 출발해 희망봉과 인도양을 거쳐 6월 말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한다. 이어, 7월 30일 바타비아를 출항해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8월 16일 제주(Quelpart, 가파도 음역 추정) 앞바다에서 난파했다고 적는다.

◆하멜, 1666년 억류 13년 만에 여수에서 탈출, 일본 거쳐 고국으로
효종실록 7년(1656) 3월 20일 기사. "표착 서양인들을 명을 받들어 서울로 압송했다". 64명의 선원 중 생존자 36명을 3년간 제주도에 억류한 거다. 조정은 이들에게 화포 제작 및 군사 관련 기술 일을 맡겼다. 하지만, 1년 뒤 1657년 여수, 순천, 나주, 남원의 전라도 지역에 분산 수용한다.
전라좌수영(여수)에 배속된 하멜은 동료 8명과 작은 목선 한 척을 훔쳐 1666년 9월 4일 여수항을 빠져나간다. 10일을 표류한 끝에 9월 14일 구조돼 나가사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인계됐다. 1667년 바타비아를 거쳐 7월 고국 네덜란드 품에 안겼다.


◆하멜이 은퇴 뒤 살던 고향 호링험 생가
23살에 고국을 떠나 14년 만에 37살로 돌아온 하멜은 동료들과 『하멜 표류기』를 써 밀린 급료를 받았다. 동시에 조선의 풍속, 제도를 서양에 최초로 알리는 역사적인 역할도 뜻하지 않게 해냈다. 은퇴 뒤, 62살까지 살다 죽은 네덜란드 남부 호링험(Gorinchem)의 고향 집으로 가보자. 2024년 찾은 하멜 생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2015년 6월 4일 대한민국 외교부와 하멜 재단 합의로 문을 열었다. 자원봉사와 후원자 기부로 운영중이다. 자료도 충실하게 모으고, 한국식 정원도 설치해 놓았다. 하지만, 1시간여 방문 중 필자 이외의 탐방객은 없었다. 하멜의 역사적 역할을 고려하면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1627년 네덜란드인 박연도 하멜에 앞서 조선 표류
하멜의 기록을 보면 "서울에서 26년 전에 표착한 동포 얀 벨테브레(Jan Weltevree)를 만났다. 그는 박연(Pak Jan)으로 불렸다"고 나온다. 조선왕조 인조실록 5년(1627) 8월 16일 "황해도 풍천군에서 서양인 2명과 일본인 1명이 탄 배가 표착했다"는 기사의 주인공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한 번도 아니고 어떻게 두 번씩이나 조선에 올 수 있었을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17세기 세계 최대 해양 무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02년 닻을 올렸다. 1600년 엘리자베스 1세 때 설립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왕의 특허 독점기업인 데 비해 세계 최초 주식회사다. 주식 발행과 배당금의 신경영 기법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문을 열었다. 로테르담 등 6개 지역 지부의 연합 본사를 암스테르담에 두고, 17인 경영위원회가 이끌었다. 1619년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정복해 아시아 본부를 차렸다. 지금도 자카르타 파타힐라 광장에 본부 건물이 오롯이 남아 박물관으로 쓰인다.

케이프타운, 벵골 등 인도 3곳, 실론(스리랑카), 말라카(말레이시아), 몰루카, 대만(1622년~1662년 지배), 나가사키(데지마, 1854년까지 일본의 공식 대외무역 창구)의 9개 아시아 지부 관리를 바타비아 본부가 맡았다. 태국, 베트남, 중국, 이란과도 공식, 비공식으로 교역했다.
1623년 인도네시아 암본 대학살을 통해 1602년부터 와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를 쫓아냈다. 아시아 향신료 무역을 도맡아 막대한 이윤을 내며 17세기 세계 해양 무역 최강자로 우뚝 섰다. 17~18세기 네덜란드에서 함대를 묘사하는 '해양화(海洋畵)' 열풍이 분 이유다.

◆해양 무역 원동력은 선박 건조 능력
'네덜란드 황금시대(Gouden Eeuw)'의 원동력은 해양 무역 제패이고 그 비결은 가장 뛰어난 선박 건조 능력이다. 네덜란드는 1568년 스페인에 독립을 선언하고, 해양 개척에 뛰어들었다. 1590년대 독자 개발한 플뤼트(Fluyt) 선(船)이 게임 체인저였다. 좁고 긴 선체에 군사 장비를 줄여 적재 공간을 크게 늘렸다.
무역에 최적화된 설계 승부수를 띄운 거다. 16세기까지 해양 무역 주도권을 쥐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갤리선보다 30~40%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주요 항구 조선소에서 표준화된 설계와 분업화로 연간 수백 척의 플뤼트 선을 건조해 네덜란드 북단 케헐 항에서 전 세계로 출항시켰다.
![[네덜란드 함대(1665년)]. 윌렘 반 더 벨데 2세. 하멜이 여수에서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발표하기 3년 전 그림. 하멜이 활동하던 시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함선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았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https://www.imaeil.com/photos/2025/08/24/2025082412581744205_l.jpg)
▲네덜란드 미술 발전도 해양무역 이윤으로... K-문화 한국의 미래?
1630년대 유럽 전체 상선의 80% 이상이 네덜란드 선박일 정도로 플뤼트 선은 독보적 존재였다. 17세기 세계 해양 무역을 제패하며 얻은 막대한 이윤은 17세기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프란스 할스 등의 네덜란드 미술 전성기를 이끄는 밑거름이었다. 비록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에 밀렸지만, 현재도 기술 선진국으로 군림한다. 네덜란드의 17세기 해양 제패와 예술 진흥 비결에서 'K-문화'로 주목받는 선박 건조 강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본다.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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