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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20>백 가지 취미가 있다네, 옥소 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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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진응회(1705〜?),
진응회(1705〜?), '권섭 초상', 1734년(30세), 비단에 채색, 65×46.5㎝, 제천의병전시관 소장(안동권씨 연잠공파 종중 기탁)

'백취옹 육십사세 진(百趣翁六十四歲眞)'으로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힌 표제가 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찬문이 있다.

이 반신상의 주인공은 64세의 권섭(1671∼1759)이다. 화가는 진응회이며 표제와 찬문은 이원태가 썼다. 전문가의 솜씨가 동원된 그림과 글씨이고 초상화의 격조를 갖춘 작품이다. 진응회는 숙종의 초상을 그린 어진화사 진재해의 아들로 대를 이어 도화서 화원으로 발탁됐고, 그도 영조 때 어진화사를 지냈다. 담백하면서도 정확한 묘사가 일품이다.

권섭은 좋아하는 것이 많다며 '백취옹'을 자처했다. 찬문에 옥소산인(玉所山人), 운제거사(雲梯居士)라는 호도 나온다. 권섭의 잘 알려진 호는 옥소다. 어렸을 때 수재로 불렸고 친가, 외가, 처가가 모두 대단한 고위 관직을 지낸 명문임에도 벼슬길로 나서지 않았다. 매우 이례적인 선택이다.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영조 무렵이라는 시대적 상황도 있을 터이고, 그의 나이 14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개인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화면 왼쪽의 글에서 권섭은 진응회가 나를 위해 이 초상화를 그렸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어느 마을 누구 같다"라고 한다며 그래서 이렇게 쓴다고 했다.

작은 얼굴에 아름다운 수염, 자네가 정말 나인가?

공업(功業)에서 물러났으니, 누구인들 무슨 대수랴!

이 사람은 한 명의 장주(장자)이자, 백 명의 동파(소식)라네

小面美髥 子眞是耶 退之熙載 其誰其那 是一莊周 卽百東坡

장자와 소동파를 흠모한 삶이었던 것 같다. 벼슬살이 대신 권섭은 평생 전국을 탐승(探勝)하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몸소 겪은 바를 글로 남겼다. 다양한 범주에 걸쳐있는 그의 글은 내용이 사실적이고 깊은 사색이 있으며 분량도 방대하다. 운문 문학만 보아도 시 3천여 수, 시조 75수, 가사 2편이다.

권섭은 여행가이고, 그림 애호가이자 화가이며, 황강과 문경에 구곡(九曲)을 경영한 원림가(園林家)이고, 풍수가이기도 하다. 쓰고 있는 모자가 독특하다. 앞은 낮고 뒤는 높은 2단 구조인 사모(紗帽)의 몸통인데 검은색이 아니고, 정면에 독특한 장식이 있으며, 좌우의 날개 대신 푸른 천을 드리웠다. 의건(衣巾)에도 연구와 취향이 있었다.

방방곡곡의 명승지를 섭렵한 권섭은 자신의 묘터를 미리 정해 놓았고 '묘산지(墓山誌)'에 음택지형도(陰宅地形圖)도 그려뒀다. 충북 단양의 구담봉과 옥순봉 사이에 있는 옥소산이다. 여기에 신명이 아끼는 명혈이 있어 음택으로 삼았다며 "언제쯤 이 힘들고 괴로운 세상을 벗어나 훌훌 털고 이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날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옥소산인(玉所山人)이 됐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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