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미국 볼티모어에서 대형 선박이 교량에 충돌해 다리 위에서 작업을 하던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배에 있던 승무원은 그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사회는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자가 감옥에 가기는커녕 영웅이라 칭송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사회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각자가 정해진 절차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지만 보고 사건을 판단하기 때문이었다. 선박 승무원은 배의 고장을 인지하자마자 긴급히 관계 당국에 통보했고 당국은 즉시 교량 진입로를 통제해 더 큰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사고라는 것은 언제든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 그 상황에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는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는가가 평가 기준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는 정반대다. 최선을 다했는지와 무관하게 사고가 나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보이스피싱 대책이 대표적이다. 은행은 잘못이 없는데도 일단 은행이 보상하라는 이른바 '무과실 책임'을 요구한다. 금융 시스템 내에서 일어난 범죄라는 이유로 그 피해를 금융사가 떠안으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은행이 보이스피싱 예방책을 충분히 마련했는데도 발생한 범죄 배상책임을 은행에 뒤집어씌우면 그 비용은 결국 수수료·금리·심사 강화로 바뀌어 소비자에게 돌아온다.
이런 무과실 책임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운전자가 규정 속도를 지키고 주의의무를 다해도 법원은 "운전자는 언제나 보행자를 예상해야 한다"며 책임을 묻는다. 특히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그 책임이 더 가혹하다. 사고의 맥락에 무관하게 운전자는 민식이법에 따라 가중처벌을 받는다.
의료 소송은 더 노골적이다. 의사의 의료행위상 과실이 전혀 없다는 점이 재판 과정에서 이미 인정됐는데도 억지 구실을 만들어 억대 손해배상을 물리는 사례는 계속 누적되고 있다. 환자가 자신의 기저질환이나 복용 중인 약을 말하지 않은 경우 등 의료행위와 인과관계가 전혀 증명되지 않은 때도 의사가 책임을 떠안는 식이다.
결과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다. 민식이법 시행 이후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부러 달리는 차 앞에 뛰어드는 '민식이 놀이'가 유행했다. 잘못이 없어도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운전자가 벌벌 떠는 바람에 생겨난 블랙 코미디다. 남발하는 의료소송 역시 그 시작은 환자 보호를 위한 장치였다고는 하나 현실은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외상외과 같은 필수과가 텅 비고 방어진료가 일상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고가 났다고, 사람이 죽었다고 일단 덮어놓고 처벌 받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은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무과실 책임이 넓어질수록 오늘은 내가 표적이 될 확률 또한 높아진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구를 벌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지 사고의 관계자들은 각자 자기 역할을 다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개선해 재발 확률을 낮출 수 있는지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라는 반사적 요구를 멈추고 책임은 있어야 할 곳에만 정확히 묻자. 책임이 없는 이는 보호하고, 사고의 본질에 집중하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선진 사회의 모습이다.
원종현 프리드먼연구원 주임연구원
* 가스인라이팅(Gas Enlighting)은 매일신문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칼럼 공간입니다. '가스라이팅'은 1930년대 가스등을 사용하던 시절 파생된 용어입니다. 가스등을 조금씩 어둡게 해 누군가를 통제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가스인라이팅'은 그 반대로 등불을 더 밝게 비춰주자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자주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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