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古宅)은 아름답다. 고택을 지키는 이들이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집은 원래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세 무너진다. 사람의 생기(生氣)가 집을 떠받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혜택, 경제적 풍요와 동떨어진 곳에 소재하고 있는 고택을 유지하는 일은 아주 특별한 책임감과 희생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고택 지키는 일을 애국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문화유산적 가치가 아주 높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국제 교류가 왕성한 요즘 자칫 방심하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위험성이 있다. 다행히 K-컬쳐가 세계를 누비고 있고 고택 지킴이 같은 애국자들이 많아서 현재로서는 큰 염려가 없다.
오래 전, 작가 이문열의 고향으로 유명한 영양 두들마을이 고향인 친구의 친구가 대구경북지역의 고택 지킴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기가 소개해 줄 테니 그 모임에 업저버(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해 보겠냐고 친구가 권한 적이 있다. 솔깃했지만 그 때는 현업에 한창 바쁠 때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도 만약 그 모임이 유지되고 있다면 한 번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안동 하회마을, 영양의 두들마을, 안강 양동마을, 성주 한개마을, 대구 화원의 남평 문씨 세거지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고택 마을이다. 관광지로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큰 마을까지는 아니지만 창녕의 아석고택이나 합천 묘산의 묵와고택, 안강 독락당(회재고택), 경주 최부자집, 함양 일두(정여창)고택도 경상도 지역의 유명한 고택 명소다. 이들 지방 소재의 유명 고택들의 공통점은 조선조 500년을 지탱해온 사대부 양반가의 자존심이 장소적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 집을 들어가도 다 엄숙 단정하고 공동체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집주인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대구 화원의 남평문씨 세거지 같은 곳에는 지역의 학인들에게 항시 개방되는 대형 전각과 서고(광거당, 인수문고)도 존재한다. 수신제가하면서 요즘 말로 '뒷것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 건축주의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그 중에서도 "천하에 넓게 살자"는 뜻의 이름을 지닌 광거당(廣居堂)은 서원(사립학교)이나 향교(공립학교) 건물이 아닌 개인 건물로서는 보기 드문 규모를 지닌 학업 공간이다. 광거당은 100여 년 전 수봉 문영박(壽峰 文永樸, 1880~1930) 선생이 지은 건물인데 '광거'라는 당호는 맹자의 대장부론에서 따온 말이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라는 현판도 범상치 않다. '수석, 늙은 이끼, 연못이 있는 집'이라는 그 뜻 역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를 지향하는 남평 문씨의 가풍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인수문고(仁壽文庫)에는 수봉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상해임시정부에서 보낸 조문(弔問) 서찰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중국에서 국내로 엄청난 양의 서책을 사들이면서 (일제의 눈을 피해) 그 대금의 절반을 독립자금으로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고 보니 고택 자체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우리 문화의 멘토 역할을 하는 '뒷것' 같은 존재다. '뒷것' 하면 극단 '학전'의 영원한 멘토 김민기 선생(1951〜2024)이 생각난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학전'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뮤지컬은 '학전 독수리 오형제'라 불리는 황정민, 설경구, 김윤석, 조승우, 장현성을 비롯해 유명 배우를 대거 배출한 산실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생전에 상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김민기 선생이 죽어서야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작년 12월 18일 수원문화재단 강당에서 열린 2025 한국민족예술인대회에서 음악가이자 예술공간 '학전' 대표였던 고인을 기리는 민족예술상 특별상이 선생을 대신한 아들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시대의 고택들도 김민기 선생이 한 일과 동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문화의 보전을 묵묵히 돕고 뒷받침하는 뒷것 정신이야말로 모든 고택 지킴이들의 하나같은 마음일 것이다.
김민기 선생 이야기가 나왔으니 개인적 스토리텔링 한마디 하고 넘어간다. 대학 시절 ROTC로 군생활을 마치고 학사 편입을 해서 나와 하숙방을 같이 쓰던 선배가 있었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마음이 설레인다⋯" 김민기의 「강변에서」(1971)을 흥얼거리던 나에게 하루는 그 선배가 김민기와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했다. 군대 시절 동기 소대장 중의 한 명이 자기 대대 본부에 김민기가 배속되었으니 구경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이미 김민기는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터라 여러 명의 소대장들이 몰려가서 김민기 구경을 했다고 한다. 기억나는 것은 고개를 잘 들지 않더라는 것, 무슨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것 등이라고 했다. 요즘의 BTS 급 대우였다.
다시 고택 이야기로 넘어간다. 잘 지켜진 고택들은 드라마나 영화에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해서 극의 미장센(장면 효과)을 극대화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 2018)에 등장하는 안동의 만휴정과 남원의 구(舊)서도역사(驛舍)가 그 대표적인 곳이다. 남원군 서도리는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고향으로 혼불문학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만휴정은 드라마 안에서는 자주독립운동의 상민(常民) 지도자인 황은산(김갑수 분) 도공의 집으로 등장한다. 그곳 주변의 자연 산천 또한 매우 아름다워서 시청자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크게 안긴 바 있다. 서도역은 지금은 신역사가 생겨서 문화유산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다. 일제 때 만들어진 곳이라 우리 고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넓게 보면 고택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 곳이다. 여성 영웅 고애신(김태리 분)이 자신을 연모하는 일본 낭인두목 구동매(유연석 분)를 단 한 마디로 KO시키는 명장면의 배경장소였다.
복면을 하고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려 뛰어들어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고애신을 저격하고 외나무다리에서(드라마에서는 제물포역으로 나온다) 일본군병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는 그녀를 기다리던 구동매는 이렇게 말한다. "아가씨, 천지를 모르고 날뛰면 제 손에 죽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제발 좀 가만히 계세유 응?)." 그 말에 고애신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해도 자네는 못할 것 같은데?!(까불지 마래이, 니 내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데이!)"
그 한 마디에 구동매는 자신을 밀치고 제 갈 길을 가는 고애신을 뒤에서 멀거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 드라마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 아닌가 한다. 나라를 지키려는 자와 나라를 팔아먹는 자, 그리고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의 대비가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힘들지 않겠나 싶다. 어릴 때 쫒기는 구동매를 자신의 가마에 태워 생명을 구해준 고애신은 그 때부터 구동매가 자기를 연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구동매는 자기를 구해준 양반집 아씨 고애신에게 "호강에 겨운 것!"이라는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녀를 연모한다. 어린 것들의 사랑하는 마음도 참 예쁘다. 고택처럼.
소설가·대구교육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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