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9일 "앞으로는 실질 GDP(국내총생산)뿐 아니라 명목 GDP도 계속 봐야 한다"고 말했고,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20일 "올해 명목 GDP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숫자만 놓고 보면 환호(歡呼)할 일"이라고 했다.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의 두 사령탑이 한국 경제의 '외형 성장'을 보여 주는 명목 GDP를 강조하고 나섰다.
1분기 명목 GDP는 전년 동기 대비 17.1% 증가했다. 명목 GDP는 그해 가격으로 계산한 경제 규모다. 인공지능(AI) 투자 확산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고 수출 단가가 높아지면서 한국 경제가 벌어들인 돈 자체가 크게 늘었다는 의미다. 올해 1분기 실질 GDP 성장률도 3.8%를 기록했다. 물가 영향을 제외한 실제 생산량 증가 폭이다. 그런데 가계 실질 소득 증가율은 0.4%에 그쳤고, 자영업자의 실질 사업소득 증가율도 0.5%에 머물렀다. 국가의 생산과 소득은 급증하는데 정작 가계로 흘러가는 돈은 거의 늘지 않았다.
성장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와 AI 관련 수출 호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장의 과실(果實)이 수출 대기업과 자본에 집중되고 가계로 전달되는 경로는 약해졌다. 국가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 체감 소득은 제자리인 이유다. 과거엔 자동차, 조선, 철강이 성장하면 대기업 생산이 늘고 협력 업체도 바빠졌다. 수출은 고용 확대와 임금 상승을 이끌었고, 소비와 내수 진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AI와 반도체가 주도하는 경제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첨단산업은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고용 유발 효과는 크지 않다. 반도체 수출이 늘어도 협력 업체와 지역 경제 전체로 파급되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경제의 성장 엔진이 바뀌면서 성장의 전달 경로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5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2020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반도체 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데 상당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은행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지난해 월평균 임금 500만원 이상 근로자는 371만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정보통신업과 금융업, 반도체 중심 제조업에선 고임금 일자리가 빠르게 늘지만 최근 취업자 증가를 떠받치는 보건·복지 서비스업에서는 500만원 이상 근로자 비중이 5%대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불평등 양상(樣相)에서 나타난다. 최근 국회 입법조사처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자산의 불평등 기여도(40%)는 소득의 불평등 기여도(33%)를 크게 앞질렀다. 특히 MZ세대에서는 자산 격차가 전체 불평등의 절반 가까이를 설명하는 핵심 요인으로 나타났다.
성장의 과실이 임금과 고용으로 확산되지 못하면 결국 기업 이익과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들 가능성이 커진다. 노동보다 자산이 삶의 격차를 결정하는 사회가 된다. 이재명 정부는 AI 투자 확대와 첨단산업 육성, 국민성장펀드 조성 등을 핵심 경제 전략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당면(當面) 과제는 국가 전체 소득을 어떤 경로로 국민에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일이다. 성장률은 높은데 소득은 늘지 않고, 수출은 호황인데 내수가 살아나지 않으며, 국가 소득이 급증하는데 중소기업 연체율은 오르는 경제는 지속되기 어렵다.
한은 총재와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제 덩치가 커졌으니 기뻐할 일이라고 한목소리를 낼 때가 아니다. 경제 성장이 임금과 고용, 지역 경제와 중산층의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성장은 숫자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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