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酒幕), 그 수없이 많은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행운유수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저녁나절과 인생길의 한순간이 낡은 영상처럼 겹치는 정경이다.
어차피 주막집 들르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왔다 가는 인생이다. 해질녘 주막에서 낡은 사발로 마시는 막걸리 맛에 나그네의 서정이 물씬 풍긴다. 무겁든 가볍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노을 지는 아득한 언덕 너머로 남은 길이 있다면 또 걸어가야 한다. 김용호 시인의 '주막에서'는 무상한 세월 속에 계속되는 소박한 서민의 여정과 애환을 관조적으로 노래한 서정시이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이 밤이 애절구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구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일제강점기 유랑가요의 고전인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1940)은 시 작품 속 '주막'보다 이별의 감성이 더 짙게 스며있다.
능수버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무르익은 봄날의 저물녘, 궂은비가 문풍지를 적시니 나그네의 시름도 물기가 흠뻑 배었다. 봉놋방에 둘러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주고받는 술잔, 저마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사연들도 밤안개처럼 피어오른다. 하물며 가물거리는 초롱불 밑에 기약없는 이별주 한 잔을 두고 마주앉은 사람들의 모습이야....나그네의 수심(愁心)이 어둠살 위로 표류한다.
'번지 없는 주막'은 식민지 근대인의 떠돌이 삶을 보듬어 주던 상징적 공간이다. 분단과 전쟁이 낳은 이산의 아픔과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의 물결, 경제적 불안정과 불평등이 빚어낸 서민적 상실감의 서정은 오랜 세월 '번지 없는 주막'의 유랑 서사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시대, 나그네 인생의 애환을 노래한 서정시와 가요는 그래서 같은 무늬를 띠고 있다.
'주막'이란 한잔 술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옛 정취를 간직한 주막일수록 그럴 것이다. 길 위에 선 나그네나 장꾼들이 다리쉼을 하거나 하룻밤을 묵어가던 곳. 삶이라는 이름으로 주모의 풍상과 행인의 정한이 술잔 속에 어른거리던 곳. 지친 다리를 도닥거려주고, 마른 목을 적셔주던 주막들은 모두 전설의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번지 없는 주막'에 쉬어가던 '나그네 설움'도 노래 속에나 남아 있다.
강석관 시인은 '겨울 주막'이란 시에서 '...마지막 밤 마지막 잔을, 이별의 절차처럼 마신, 겨울 주막에서, 그가 놓고 간 술잔 속에, 웃음 한 점이 외롭게 남아 있다. 겨울보다 더 추운 모습을 하고'라고 읊었다. 그 주막에 가면 못내 겨워 울던 사람이 있을까. 술잔 속에 떠 있던 그 사람의 얼룩진 눈물이 남아 있을까. '번지 없는 주막'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처연한 내면 풍경이기도 했다.
필자가 대학 시절 문학 강의를 들었던 이기철 시인은 '주막' 시에서 '...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 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葉書)가, 대추나무 돌담에 소지(燒紙)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라고 했다. 팍팍한 여로(旅路)에 쉼표마저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지친 걸음을 쉬어갈 주막은 어디에 있는가. 번지가 없어도 좋다. 여수(旅愁)가 스민 그 주막에 가고 싶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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