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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이야기] 한결같음이 머무는 집, 구미 채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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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그늘 아래 흥기문과 채미정, 구인재가 금오산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회화나무 그늘 아래 흥기문과 채미정, 구인재가 금오산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의로운 지사를 품은 금오산

'의리'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정치도, 스포츠도, 드라마도 툭하면 의리를 꺼낸다. 그런데 정작 삶에서 의리는 낯선 말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의리보다 이익을 먼저 따지는 시대이다.

'한결같다'는 말이 그리웠다. 외풍에도 뿌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흔들려도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삶이 그리웠다. 그런 마음에 기대어 구미 금오산(金烏山, 976m) 자락의 정자를 찾았다. 이곳에는 한결같은 은일지사를 기리는 집이 있다. 채미정이다.

채미정 입구에 발을 딛자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나그네를 반긴다. 고고한 인격처럼 하늘로 곧게 뻗은 소나무 사이로 오솔길을 보인다. 그 길로 발길을 놓는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굽어진 오솔길을 걷는다. 그렇게 숲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입구다.

입구에는 소담한 바위 하나가 있다. 바위에는 '採薇亭'(채미정)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화려하지 않고 담담하다. 가깝게 길재(吉再, 1353~1419)의 「회고가」가 새겨진 자연석 시비가 서 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사방으로 열린 채미정은 금오산과 계곡, 숲을 품은 채 자연을 넉넉하게 받아들인다.
사방으로 열린 채미정은 금오산과 계곡, 숲을 품은 채 자연을 넉넉하게 받아들인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달라졌다는 탄식은 육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결같은 인걸을 그리워한 길재의 탄식이 귀에 들린다. 시비에 적힌 길재의 마음을 읽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석교를 건넌다. 아래로는 7월의 열기를 시원하게 적시는 청정수가 흐른다. 금오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채미정 앞을 굽이친다.

석교를 다 건너면 흥기문(興起門)이 기다린다. 문은 높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 문을 넘는 순간, 길재가 지켜낸 한결같은 풍경이 시작된다.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은 길재의 의로움을 품으며 지금도 제자리를 지킨다.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은 길재의 의로움을 품으며 지금도 제자리를 지킨다.

◆한결같은 삶을 기리는 집

문 너머 오른편으로 단정한 채미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울창한 회화나무와 담장에 감싸인 정자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오히려 절제된 규모여서 위압적이지 않아 더 바라보게 된다. 한결같은 사람을 만세에 기억하기 위해 세운 집.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발걸음도 저절로 느려진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 정자는 기단 위에 단정히 앉아 있다. 중앙 한 칸은 온돌방이다. 온돌방 둘레에는 우물마루가 깔린 대청이다. 온돌방 사면에는 들문이 달려있다. 굵은 기둥 열여섯 개가 지붕을 받치고 있고, 대청은 벽체가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다.

여름이라 들문을 모두 들어 올렸다. 방과 마루의 경계가 없어진 정자에는 바람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계절에 따라 들문을 여닫으며 자연을 집 안으로 불러들인 선조의 지혜가 돋보인다. 닫기보다 열어둔 이 정자는 오히려 낙향하여 세상을 더 크게 품은 길재를 떠올리게 한다.

처마 끝 너머로는 금오산 능선이 우람하고, 담장 밖 계곡에서는 물 내리는 소리가 쉼 없이 들린다. 거대한 회화나무는 넓고도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는 조화로운 풍경이다. 이곳의 풍경은 이렇게 한결 같았으리라.

채미정 뒤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경모각(敬慕閣)과 유허비각(遺墟碑閣)이 나온다. 경모각에는 길재의 영정과 숙종이 친히 지어 내린 어필 오언절구가 모셔져 있다. 새 왕조는 길재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렸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삶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모각 옆에는 '고려문하주서야은길재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遺墟碑)가 서 있다. '유허(遺墟)'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남는다. 그 사람이 남긴 자취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채미정은 길재가 실제로 살던 집이 아니다. 그의 한결같음을 기리기 위해 영조 44년(1768년) 선산 부사 민백종과 지역 유림이 정자를 세운다. 처음에는 한 채의 정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나며 이곳은 길재의 한결같음을 기리는 집으로 남았다.

길재의 영정과 숙종의 어필을 모신 경모각은 채미정을 기림의 집으로 완성한다.
길재의 영정과 숙종의 어필을 모신 경모각은 채미정을 기림의 집으로 완성한다.

사람들은 왜 이 정자를 '길재정'이라 부르지 않고 '채미정'이라 했을까.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이다. 중국 고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은나라가 망하자 백이와 숙제는 새 왕조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간다. 예사롭지 않은 선택이다. 그들은 고사리를 캐며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의리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고려가 멸망하자 길재는 고향 선산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모시며 금오산 아래에서 후학을 길렀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삶을 백이와 숙제에 견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0년이 흐른 뒤, 이 정자를 세우고 '채미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재는 세상을 등진 은둔자가 아니다. 벼슬을 마다했을 뿐, 사람을 기르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금오산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은 김숙자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의 큰 줄기가 되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했다. 선산이 인재의 고장으로 불리게 된 밑바탕에 길재의 가르침이 자리하고 있다.

채미정 옆에 자리한 구인재(求仁齋)로 발걸음을 옮긴다. 백이와 숙제를 두고 공자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한 '논어'의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채미정이 의리를 기리는 집이라면, 구인재는 그 정신을 인으로 이어가는 곳이다.

널찍한 마루에 걸터앉으니 오래된 나무결 감촉이 손 끝에 닿는다. 다시 눈을 들어 금오산을 바라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은 한결 믿음직하다. 금오산에서 부는 바람이 구인재를 천천히 스칠 때마다, 회화나무가 드리운 그늘은 더욱 짙어진다.

이 풍경 속에 앉아 있으니, 길재가 왜 이곳에 은거하게 되었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의리란 큰 소리로 외치는 구호가 아님을 또한 알겠다. 묵묵히 지켜내는 게 의리임을 채미정의 풍경이 조용히 일깨운다.

◆채미정의 풍경, 그 너른 울림

일어설 수 있겠다. 돌아갈 수 있겠다. 채미정의 풍경을 눈에 담고 일상으로 걸어갈 수 있겠다. 구인재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채미정 앞에 선다. 마치 채미정에 앉은 길재 어른이 나그네를 넌지시 바라보는 착각이 든다. 멀고 긴 세월을 견딘 정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이 없다. 이 한결같은 풍경을 잊고 싶지 않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흔들릴 인생이지만 오늘 이곳에서 만난 한결같은 풍경을 잊지 않는다면, 거친 세상 버틸 수 있을 듯하다.

석교 가운데 서서 사방을 돌아본다. 그제야 채미정은 그저 정자 이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금오산과 맑은 계류, 회화나무 그늘, 석교와 정자 그리고 이 주변을 걷는 사람을 아우르는 모든 것이 채미정 풍경이다.

길재가 세상을 떠난 지 육백 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한결같음을 찾아 이곳을 걷는다. 업적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의리를 버리지 않았던 길재의 삶이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금오산을 떠나며 '한결같다'는 말을 되새긴다. 사람의 삶이 어찌 늘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때로는 흔들리고, 길을 잃고, 넘어질 때도 있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흔들리더라도 첫 뜻을 지켜내는 선택이 귀중한 법이다. 금오산 아래 채미정은 오늘도 한결같은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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