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광복절에 등장하는 창작 소재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과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사와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룬 작품들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에는 좋은 소재다. 역사적 교훈으로 한 번쯤 환기하기에는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행사용이고 역사적 시간을 예술성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다. "대체적으로 이런 류(類)에 속하는 작품들은 딱 이 정도로 끝난다. 역사성을 과거부터 뻔한 타임스케줄로 교과서처럼 재현하는 극의 한계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경을 넘었던 이들이 다시 강제이주의 비극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던 디아스포라의 삶을 우리 연희와 소리로, 사물과 신명으로, 연극적인 놀이성으로 달린다면 극은 180도 달라진다. 오세혁 작·변영진 연출의 〈극장은 달린다〉(대학로 쿼드극장, 예술감독 송형종, 제작 PD 박소리)는 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송형종)이 올해 광복 81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창작 초연작품이다. 고려극장을 모티브로 하는데도 홍범도 장군의 서사를 과감하게 덜어내니 고려극장과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 서사가 선명하다. 역설적이게도 홍범도 장군의 서사를 중심에 놓지 않으니 그 시대를 관통했던 한 인물의 존재가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할까. 다른 작품이 됐다.
작품의 시간과 배경은 1932년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으로 돌려 고려극장의 역사성과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연희와 소리, 신명으로 달린다. 고려극장이 달려온 광활한 94년의 세월을 우리 소리와 연희, 사물놀이와 변영진의 연극적 놀이성과 광대적인 기질로 풀어낸 작품인데, 광복절에 맞춤형으로 제작된 연극이라고 하기에는 작품성이 우수하다. 나라를 잃고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다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가족들이 흩어지고 우리말과 우리 소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서도 고려극장은 멈추지 않는다. 화물열차에서도 연극을 하고, 황량한 벌판에서도 무대를 만들고, 고려인들이 흩어져 있는 집단농장을 찾아 트럭을 타고 달린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화물열차에서도 〈춘향전〉은 계속되고, 황량한 벌판에 버려져도〈심청전〉을 시작한다. 연극을 멈추지 않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이고, 고려인으로 살아온 민족애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대학로 쿼드극장에서 공연을 한 뒤 키르기스스탄(비슈케크),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 카자흐스탄(아스타나) 등 중앙아시아까지 달리고 있다.
◇오세혁의 텍스트, 변영진의 무대, 서울문화재단 제작
대학로 쿼드극장 입구부터 연희와 사물놀이로 배우들이 직접 길놀이를 하며 서울 찍고, 중앙아시아 3개국을 달리는〈극장은 달린다〉가 출발한다. 극장 안에 들어서면 쿼드극장의 공간 활용과 연출적인 오브제들이 눈에 띈다. 무대 공간은 마당극처럼 열린 무대이지만, 뒤편으로는 의상들이 이동식 행거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악기와 소품들이 늘어서 있어 마치 떠돌이 광대 패의 짐 보따리를 그대로 풀어놓은 듯, 십여 개의 의상 행거들은 때로는 고려인들의 이주 열차가 되기도 한다. 강제이주를 견뎌야 했던 화물열차의 객차가 됐다가, 황량한 크질오르다의 벌판과 고려극장의 순회공연을 싣고 달리는 트럭으로도 변주되는데, 이 틈으로 변영진의 극 중 장면 만듦새가 웃음도 터지고 짠하다. 특히 화물열차 칸에서 떨어지는 이주민들의 장면을 슬로우 동작으로 처리했는데 연출적 재치가 상당하고, 달리는 열차 안 극 중 극도 그렇다. 그렇게 배우들은 고정된 무대장치 없이 몸과 오브제로 1932년 신한촌에서 1937년 강제이주의 화물열차, 크질오르다와 우슈토베를 거쳐 중앙아시아의 집단농장까지 100분을 달린다. 무대의 오브제들은 고려인들의 이동 경로를 재현하는 놀이적 장치이면서, 중앙아시아를 유랑하며 살아온 고려인들의 생존의 시간이다.
특히 화물열차가 움직여도 〈춘향전〉은 중단되지 않고, 죽음과 맞닥뜨린 순간에는 갈대 너머의 강을 인당수로 상상하며〈심청전〉을 시작한다. 사라질 위기에도 고려극장과 고려인들의 연극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면 역사에서 사라지니까." 그래서 고려극장은 달린다. <춘향전〉과〈심청전〉은 잊지 말아야 할 민족의 기억이고, 우리말과 우리 소리의 뿌리다. 연극의 유랑은 디아스포라들이 살아온 삶과 겹쳐진다. 이후 장면들도 좋다. 고려극장은 행거가 트럭이 되는 변영진식 놀이로 트럭에 대본과 소품, 의상을 모조리 싣고 고려인들이 흩어져 살아가는 집단농장으로 달려간다. 강제이주 화물열차에서<춘향전〉들 보다가 헤어진 아이 엄마를 다시 만나고, 중단됐던〈춘향전〉은 열차 안 객실에서 이어진다. 춘향과 몽룡의 이별은 강제이주로 가족을 잃어버린 고려인들의 현실이 된다.
페르가나 분지에서의 극 중 장면에서는 우즈벡, 키르기스, 타지크, 카자흐 사람들과 고려인들이 한데 섞이고〈춘향전〉의 사랑가는 우즈벡어, 키르기스어, 타지크어, 카자흐어와 우리말로 뒤섞인다. 한 가락 안에서 다섯 민족의 언어가 섞이고 연희의 신명으로 국경을 초월하는 고려인들 이주의 역사를 소환하는 변영진 방식의 놀이성은 의미는 매서우면서도 우리의 소리와 가락, 리듬으로 민족의 정서와 한을 담아내니 신명은 뜨겁고 그 안에 담긴 이주의 아픔은 짙다. 웃음과 놀이로 달리는데도 그 신명의 끝은 고향을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삶과 애환으로 뭉쳐지고, 고려극장의 연극은 민족의 기억이고 잊지 말아야 할 말이며, 사라져서는 안 될 우리 소리다. 그렇게 달리는 고려극장의 유랑은, 디아스포라들이 살아온 삶과 겹쳐져 연출은 소리, 연희, 광대성과 마당극적 놀이성으로 오세혁의 텍스트를 탁월하게 살린다. 특히 이 극 중 장면에서 고려인 4세 배우 이사샤가 부르는 '사랑가'는 중앙아시아의 국경을 초월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애환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나 다름없다.
변영진 연출의 백미는 백스테이지 공간을 고려인 연희패 공간처럼 놀이적으로 활용하면서도, 무대승강기로 공간 자체를 무대 하부로 가라앉히고 다시 상승시키며 공간의 변화를 통해 소멸과 기억, 역사의 시간을 마치 블랙 라이트처럼 형상화하는 데 있다. 그래서 오세혁과 변영진이 달리게 하는 고려인 이주 94년의 시간이 따끔하고 아프다. 이 작품은 오세혁 작가가 연희와 마당, 장면을 소리와 우리 것의 스토리인 〈심청전〉,<춘향전〉의 풍자와 해학, 신명으로 고려인 이주사의 아픔으로 전복시키는 톡톡 튀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그 텍스트의 사이를 변영진 연출이 장면을 그려내는 강렬한 에너지와 장면의 밀도, 휘모리장단처럼 몰아치는 놀이로 틈새를 메우고 전환하는 능청스러움과 선명하게 드러나는 미장센으로 고려인들의 아픔을 확 베어내는 연출적인 테크닉도 좋다. 배우들은 무대를 종횡하며 판소리, 연희, 아코디언, 트럼펫, 장고, 기타, 사물놀이를 연극적으로 현대화해 공간을 마당놀이의 연희처럼 놀아내고, 극 중 장면들을 연결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에너지들도 상당하다. 오히려 고려인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이 되고,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려 광대로 달리는 신명의 몸짓들이 더 아프다. 그 아픔이 고려인들이 견뎌온 삶이기에, 아파지는 작품이면서도 의미는 크다.<극장은 달린다〉는 오세혁 작가의 재기발랄한 서사와 변영진 연출의 공간 감각이 무대 위에서 절묘하게 맞물린 작품이다. 8·15 광복절 특별기획 프로그램의 의미를 지우고, 올해 하반기에 몇 가지만 걷어내고 재공연을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를 다룬 작품 중 이 작품만큼 이주민족의 아픔을 신명과 웃음, 연희의 놀이성으로 풀어낸 작품도 없을 듯 하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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