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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기자의 한 페이지] 산악인 박정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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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떠날 수 없는 내 운명…히말라야 꿈꾸는 이들, 산길 열어주고파"

산악인 박정헌 씨가 수태골 등산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산악인 박정헌 씨가 수태골 등산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히말라야 등정을 갈망하는 이들과 경험을 나누며 그들에게 산길을 열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산을 오르는 데도 여러 길이 있다. 쉽지만 지루한 길도, 가파르지만 짧은 코스도 있다.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어떤 길을 택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산악인 중엔 유독 어려운 곳을 찾아 오르는 이들이 있다. 올라가는 과정을 중시하는, 이른바 '등로주의'를 추구하는 부류다. 경남 사천 출신으로 진주에 사는 산악인 박정헌(55) 씨는 국내를 대표하는 등로주의 등반가로 꼽힌다.

그런 그가 지난달 23일 대구 팔공산을 찾았다. 그는 오는 11월 말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히말라야 타르푸출리(5663m)에 오른다. 이날 그는 대원들과 수태골 암벽에서 히말라야 등반을 위한 2차 훈련을 했다. 유명 산악인과 아마추어와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박 씨는 2000년대 중반까지 히말라야 거벽 등반가로 이름을 날렸다. 18세 때인 1989년 초오유(8201m) 동계 남동벽 등반을 시작으로 1994년과 1995년 난벽으로 악명 높은 안나푸르나(8091m) 남벽과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을 한국인 최초로 올랐다. 2000년에는 K2(8611m) 남남동릉을 무산소로 등정했다. 2002년 시샤팡마(8027m) 남서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2005년 세계 최초로 촐라체(6440m) 북벽 동계 등정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등반은, 2인조로 도전한 촐라체 북벽에서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다. 하산 중 로프로 연결돼있던 후배가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에 빠진 것이다. 박 씨는 갈비뼈가 부러지고도 후배가 매달린 로프를 놓지 않고 버텼다. 다리가 부러진 후배는 2시간여의 사투 끝에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왔고, 둘은 만신창이가 된 채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 원정에서 동상으로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산악인으로선 사망 선고와 다름없는 부상이었다.

다시 등반에 나설 수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멍한 상태로 살았다. 시간이 흐르고 몸과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다시 산이 그리워졌다. 방식을 바꿔 패러글라이딩, 산악스키, 산악자전거, 카약 등으로 히말라야 곳곳을 누볐다. 10년 전부터는 엄지만 남은 손으로 암벽 등반을, 이듬해엔 히말라야 등반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그는 예전처럼 첨예한 고산등반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산을 오르며 등반가의 삶을 살고 있다. 히말라야 도전을 꿈꾸는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하는 등반대를 꾸린 건 2017년 로부제 동봉(6119m) 원정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박 씨는 "어느 날 문득 그간의 등반 경험이나 기술을 썩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히말라야 등정을 갈망하는 이들과 경험을 나누며 그들에게 산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박정헌 씨는 사고 이후 등산을 하지 않다가 2011년 패러글라이딩으로, 2014년에는 패러글라이딩·스키·산악자전거·카약으로 히말라야 2천400㎞를 횡단했다. 박정헌 씨 제공
박정헌 씨는 사고 이후 등산을 하지 않다가 2011년 패러글라이딩으로, 2014년에는 패러글라이딩·스키·산악자전거·카약으로 히말라야 2천400㎞를 횡단했다. 박정헌 씨 제공

-사고 이후 10년 넘게 등반을 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2016년 진주시장님과 히말라야를 다녀온 게 계기가 됐다.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뒤 시장님께서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시길래 실내 암벽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후배들의 바람을 전달했더니 진주종합경기장 내에 공간을 마련해주셨다. 이곳에 실내 암벽 등반장을 열었다.

처음엔 후배들이 관리를 했었는데 이들이 하나둘 빠지게 되면서 직접 운영해야할 상황이 돼버렸다. 회원 지도를 위해 클라이밍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다. 이를 계기로 주말이면 실내를 벗어나 회원들과 암벽등반을 하러 다니게 됐고. 자연스럽게 히말라야 등반으로 이어지게 됐다. 암벽등반의 경우 난이도 5.12a(상급자 수준의 바윗길)급 루트를 오를 정도가 됐다.

-히말라야 등반의 경우 누구나 혹할만한 매혹적인 산을 즐겨 다니는 것 같다. 등반 대상지를 선택하는데 기준이 있나.

▶예전에 추구했던 고난도 등반은 이제 불가능하다. 과거엔 알피니즘이라는 틀 속에서 등반 난이도 등을 고려해 대상지를 선택했다면 지금은 신체적으로 그런 등반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너무 위험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즐겁게 다녀올 수 있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산에 눈길이 많이 간다. 2022년에 다녀온 타르푸출리(5663m)가 그렇다. 히말라야 가이드 책자를 펼쳐놓고 해발 6000m 전후의 적당한 산을 찾다가 예쁜 능선을 지닌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게 타르푸출리였다.

그 다음 다녀온 아마다블람(6812m)도 '세계 3대 미봉' 중 하나로 꼽히는 산이다. 예전 신루트 개척을 목표로 눈여겨보긴 했지만, 당시엔 산의 높이 또한 고려 대상이던 탓에 등반할 기회가 없었다. 노멀 루트로라도 한 번 올라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선택했다. 페루에 있는 알파마요(5947m)도 매우 아름다운 봉우리다. 지난 겨울 등반할 예정이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녀오지 못 했다.

2022년 히말라랴 타르푸출리(5663m)를 찾은 박정헌 씨가 정상부 능선을 오르고 있다. 오는 11월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오를 예정이다. 박정헌 씨 제공
2022년 히말라랴 타르푸출리(5663m)를 찾은 박정헌 씨가 정상부 능선을 오르고 있다. 오는 11월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오를 예정이다. 박정헌 씨 제공

-여전히 도전하는 삶을 산다. 특히 2022년엔 한라산·지리산(여수)·설악산을 24시간 내에 완주하는 '3피크 챌린지'에 성공해 화제를 모았다.

▶이 도전은 꼭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에 사는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후퍼의 '3피크 챌린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후퍼의 24시간 챌린지는 한라산 정상에서 시간을 측정해 설악산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기준으로 했다.

제 기준에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등산로 입구에서 산행이 시작되고 산을 내려와야 등산이 끝나는 만큼, 최초 출발시점부터 종료시점까지의 시간을 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제대로 된 '3피크 챌린지'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산에 대한 타이틀을 외국인에게 빼앗기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바로 제주도로 갔다. 오전 6시 한라산 성판악을 출발해 1시간 56분 만에 백록담 정상에 올랐다. 보통 4시간 40분 걸리는 10여km 코스를 2시간 안에 주파한 거다. 하산 후 공항으로 이동해 오전 11시 10분 비행기를 타고 여수로 이동했다. 여수에서 지리산 중산리까지는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 오후 1시 50분 산행을 시작해 1시간 40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이후 지인의 도움으로 양양 오색으로 이동한 뒤 오전 0시 5분 산행을 시작해 2시 30분에 대청봉에 섰다. 하산 완료 시각은 새벽 5시 15분. 총 23시간 15분이 걸렸다.

이때는 이미 제임스 후퍼가 시도한 뒤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주MBC에서 제 도전을 방송으로 다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는 거다.

산악인 박정헌 씨는
산악인 박정헌 씨는 "히말라야 등정을 갈망하는 이들과 경험을 나누며 그들에게 산길을 열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9년 만에 다시 아마추어 산악인들과 등반대를 꾸렸다.

▶2017년 '히말라얀 알파인 스쿨'이란 이름으로 아마추어 산악인을 모집해 로부제 동봉(6119m)을 등반했다. 많은 이들과 등반 경험을 나누고 히말라야 등반의 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매년 꾸준히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방송활동과 강연 등의 여러가지 일정이 이어지면서 실천하지 못했다.

올해 초 그림책 작가 몇 명과 마르디히말 트레킹을 다녀왔다.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돌아오자마자 내년 1월 푼힐 트레킹을 가겠다며 며칠 새 멤버를 다 구성해 놨을 정도다. 트레킹 만으로도 한없이 행복해하는 작가들의 표정을 보면서 다시 아마추어 등반대를 꾸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등반이다. 이왕이면 오랜 기간 히말라야 등반을 꿈꿔온 사람들에게 제 경험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200명 정도의 버킷리스트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제 삶 또한 더욱 의미있을 것 같다.

산악인 박정헌 씨가 수태골 등산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산악인 박정헌 씨가 수태골 등산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히말라야 등정을 갈망하는 이들과 경험을 나누며 그들에게 산길을 열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박정헌 씨는 이달 초 이탈리아 돌로미티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네팔 라수와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서, 한국인 실종자 수색을 위한 구조 자문역으로 네팔에 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리고 짧은 글로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허비한 시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히말라야의 바람 냄새를 맡고, 포말을 일으키며 흐르는 급류의 소리를 듣고, 차가운 산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던 순간들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길 위에서 죽도록 힘들었고, 때로는 죽음이 바로 곁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그렇게 히말라야에 미쳤고, 그 산의 사람들과 문화에 빠져 작은 박물관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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