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군대가 파미르를 넘어 점령했던 파키스탄의 소발률국(길기트)을 보고 쿤자랍 패스를 넘어 카슈카르를 거쳐 투르판에 와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직전인 640년에 멸망시켰던 고창국의 수도이다. 이제는 우리 역사를 거시적으로, 유라시아 세계와 연동시켜 해석해야 한다.
◆나당전쟁과 동부 유라시아 질서의 재편
668년 음력 9월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끝내 붕괴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한 598년부터 이어진 동아시아의 그레이트 게임도 끝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지자 그 빈 공간을 누가 차지하고 어떤 질서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공동의 적을 공격했던 신라와 당은 곧 적으로 돌아섰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벌어진 '나당전쟁'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신라와 당 두 나라가 한반도의 영토를 놓고 싸운 전쟁으로만 이해하면 본질을 놓친다. 고구려 유민과 백제계 주민들이 참여했고, 당은 말갈과 거란 등 동북방 여러 집단의 군사력을 동원했다(서영교). 경기만과 금강 하구에서는 수군이 맞섰다. 같은 시기 서쪽에서는 왕이 바뀐 토번이 당을 압박했고, 북방에서는 돌궐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663년 백강전투에서 패한 왜국도 국가체제를 재편하면서 670년에 '일본'이라는 새 국호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결국 나당전쟁은 고수전쟁, 고당전쟁, 소위 삼국통일 전쟁의 뒤를 이은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제4단계이자 대단원이었다.(고구려해양사연구)
◆승전한 동맹국들은 왜 다시 싸웠나
신라와 당은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서 살아남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당과 손을 잡았다. 반면 당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요동과 한반도를 제국의 동방질서 안에 편입시키려 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고구려 멸망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신라에도 계림대도독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라는 당의 제국질서에 들어갈 것인가, 세계제국과 다시 싸울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고, 결국은 후자를 선택했다.
670년에 신라 장군 설오유와 고구려의 고연무는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단동 외곽의 봉황성) 방면으로 진출했다. 불과 2년 전에 신라는 당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이제는 고구려 유민과 손잡고 당과 싸웠다. 적과 동맹의 조합이 뒤집힌 것이다. 나당전쟁은 단순한 양국전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또 다른 재편 국면임을 보여준다.
◆멸망한 고구려가 다시 전쟁의 주체가 되다
국가는 멸망했지만 터와 사람과 기억, 군사경험과 정치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모잠·고안승·고연무 등을 중심으로 고구려 복국전쟁이 일어났고, 신라는 보장왕 의 서자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익산인 금마저에 자리 잡게 했고, 이어 보덕국으로 재편했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인 데에는 현실적인 전략이 강했다. 고구려인들은 오랫동안 수·당과 싸우며 성곽전과 산악전, 장거리 방어전에 익숙했다. 그들의 대당 적대감과 경험은 신라에게 중요한 전쟁자산이었다.
이 때문에 나당전쟁은 고당전쟁의 연속이기도 했다. 고구려라는 국가는 사라졌지만 고구려인의 대당전쟁은 신라와 결합해 계속되었다. 신라는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반자로 바꾸었다. 군사적 필요에서 시작했지만 이것은 훗날 고구려·백제계 주민들을 신라 체제 안에 받아들이는 통합으로 연결됐다.
◆말갈과 거란, 또 다른 전쟁 주체
당군도 단일한 중국인 군대가 아니었다. 당은 광대한 제국을 운영하면서 돌궐·철륵·거란·말갈 등 여러 집단을 군사력으로 활용했다. 나당전쟁에서도 말갈군은 당군과 함께 신라와 싸웠고, 거란계 병력도 동북방 군사체제에 동원됐다.
실제 전쟁구도는 '신라 대 당'보다 훨씬 복합적이었다. 신라군과 고구려계 세력, 백제 옛 지역의 주민들이 한쪽에서 움직였고, 다른 쪽에서는 당의 정규군과 안동도호부 세력, 말갈·거란 군사집단이 움직였다. 7세기 동북아시아는 오늘날의 고정된 국경과 민족 범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다종족·다중심 세계였다.
이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결합은 뒤에 발해를 건국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나당전쟁은 이미 다음 시대의 동북아 질서를 품고 있었다.
◆670년,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흔들린 당
신라가 당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더 큰 유라시아 국제정세가 있었다. 7세기 중반 당의 세력은 절정에 올랐다. 630년 동돌궐을 무너뜨렸고 657년 서돌궐마져 격파해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동쪽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 절정기에 균열이 일어났다. 토번이 성장해 청해 지역과 타림분지로 진출했고, 670년 당군은 대비천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당연히 안서 4진의 지배권도 흔들렸다. 놀랍게도 이 해가 나당전쟁이 본격화된 해다.
동쪽에서는 신라와 고구려 유민이 당에 도전했고, 서쪽에서는 토번이 중앙아시아의 당 질서를 흔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토번 때문에 신라가 이겼다"고 할 수는 없다. 당은 670년대에도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토번은 신라 승리의 직접 원인이라기보다 당이 한반도에 모든 힘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 중요한 국제적 조건이었다.
◆돌궐과 유라시아 질서의 재편
돌궐 문제는 연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제1돌궐제국은 630년에 무너졌고 서돌궐도 657년 크게 해체됐다. 따라서 나당전쟁에서 독립된 돌궐제국이 신라를 직접 도왔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북방의 불안정은 계속됐다. 679년 이후 돌궐계 반란이 커졌고 682년에 제2돌궐 제국이 성립했다. 나당전쟁 직후에 당의 북방질서도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서남의 토번, 북방의 돌궐, 동북의 고구려 유민·말갈·거란, 동쪽의 신라가 각자의 공간에서 움직이면서 660년대 당이 거의 완성한 듯 보였던 일극적 유라시아 질서는 다시 다극화됐다.
◆백강의 패전과 '일본'의 등장
일본열도의 변화도 이 국제대전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663년 백강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왜국은 대마도·이키·규슈와 세토내해의 방어를 강화하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계 기술자와 지식인을 활용했다. 외침의 공포는 중앙집권과 율령국가 건설을 재촉했다.
그리고 670년 전후 '일본'이라는 국호가 국제기록에 나타난다. 백강 패전과 백제·고구려 멸망이 왜국의 국가 정체성 재편에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하다. 7세기 국제대전은 한반도의 국경만 바꾼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왜국의 정치체제와 대외정체성도 변화시켰다.
◆신라는 어떻게 세계제국을 막았나
신라는 처음부터 승리한 것이 아니다. 672년 석문(황해도 서흥)전투에서는 크게 패했다. 이후에 전쟁방식을 바꾸었다. 당군과 넓은 평지에서 정면결전을 하기보다 산성과 강, 좁은 통로를 활용하면서 장기전으로 전환했고, 당의 병참과 이동로를 끊는 데 힘을 쏟았다.
당군은 요동과 평양을 거쳐 남하하거나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야 했다. 말·무기·식량을 긴 거리로 공급해야 했다. 반면 신라는 자기 생활권에서 싸우며 산성과 하천·산악로·해안을 활용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수와 당을 상대로 사용했던 '거리와 병참의 전쟁'을 신라도 이어받은 것이다.
675년 매소성(경기 양주) 전투는 분수령이었다. 『삼국사기』는 이근행의 당군을 20만 명으로 기록한다. 숫자의 정확성은 검토가 필요하지만 대규모 원정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는 당군을 물리치고 많은 군마와 무기를 노획했다. 동시에 서해에서도 당 수군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676년에는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신라 수군은 여러 차례 격전 끝에 당군을 물리쳤다. 660년 당 수군이 이 서해와 금강 하구를 이용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16년 뒤에는 신라가 같은 바닷길에서 당군을 막아낸 것이다.
매소성과 기벌포는 육지와 바다의 서로 다른 전투였지만 하나의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북방 육상 진입축과 황해 해상축을 동시에 차단했다. 나당전쟁의 승리는 성 하나를 지킨 승리가 아니라 당의 해륙 복합전선을 끊어낸 승리였다.
◆전쟁과 외교를 함께 사용하다
신라의 승리에는 외교도 중요했다. 신라는 당과 싸우면서도 외교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다. 문무왕은 설인귀와 서신을 주고받고 당 황제에게 사죄사절도 보냈다. 674년 당의 고종이 문무왕의 관작을 빼앗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압박했을 때에도 신라는 군사적으로 저항하면서 외교적 출구를 열어두었다.
싸우되 관계를 끊지 않고, 저항하되 상대의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았다. 신라는 당보다 국력이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간에서 전쟁 지속능력을 높이고, 고구려 유민을 끌어들이며, 해륙의 병참로를 끊고, 국제정세와 외교를 함께 이용해 상대의 힘을 분산시켰다. 약소국이 대제국을 상대할 때 필요한 것은 상대보다 더 큰 힘이 아니라 힘이 작동하는 조건을 바꾸는 전략이었다.
◆군사적 승리에서 사람의 통합으로
676년 당군을 밀어냈다고 통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전쟁은 국토를 황폐하게 했고 백제·고구려·신라 사람들 사이에는 적대와 불신이 남았다. 이제 신라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영토보다 사람이었다.
신라는 우선 고구려와 백제 유민에게 관직을 주고 군사체제에 편입시켰다. 뒤에 정비된 9서당에는 신라인뿐 아니라 고구려·백제계와 말갈계 사람들도 포함됐다. 지방제도도 확대된 영토와 주민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재편됐다. 불교와 사찰, 원효·의상 등의 사상 활동 역시 전쟁 뒤 사회를 통합하고 공동의 정신세계를 만드는 데 작용했다.
신라의 통일은 두 단계로 볼 필요가 있다. 첫 단계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군사적 통합이었다. 두 번째는 나당전쟁을 거쳐 외부의 직접지배를 막고 서로 적대했던 주민들을 하나의 정치공동체에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통일의 끝이 아니라 통합의 시작이었다.
◆한민족사와 동아시아사에서 무엇을 남겼나
한민족사의 장기 흐름에서 나당전쟁의 가장 큰 의미는 당의 한반도 직접지배를 저지한 데 있다. 신라는 이 전쟁을 통해 독립적인 정치공간을 지켰고, 고구려와 백제의 사람들을 새 체제 안에 받아들이면서 후대 한국사의 중요한 공동체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를 완전한 민족통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 고구려의 요동과 만주 지역 대부분은 신라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곳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세력이 다시 결집해 698년 발해를 세웠다. 따라서 나당전쟁은 통합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분화의 출발점이었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삼국 주민을 포괄하는 국가로 발전했고, 북쪽에서는 발해가 성장했다.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에서 시작된 전쟁은 당의 고구려 공격, 660년 백제전쟁, 663년 백강전투, 668년 고구려 붕괴를 거쳐 670~676년 나당전쟁으로 이어졌다. 약 80년에 걸쳐 적과 동맹은 끊임없이 바뀌었고, 전쟁의 범위는 요동과 한반도에서 황해·일본열도·몽골초원·타림분지와 티베트고원까지 연결됐다.
676년 기벌포의 파도가 잦아들면서 이 장기 국제대전도 한 시대의 막을 내렸다. 고구려와 백제는 사라졌지만 당의 일극적 동아시아 지배도 완성되지 못했다. 신라는 새로운 통합을 시작했고, 북방에서는 발해가 태어날 조건이 마련됐다. 왜국은 일본으로 변신했고 토번과 돌궐은 유라시아의 강국으로 다시 등장했다.
나당전쟁은 단순한 신라의 대당 승리가 아니다. 한반도의 독자적인 정치공간을 지켜낸 전쟁이면서, 동부 유라시아가 하나의 제국질서로 수렴되지 않고 여러 중심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동아시아가 시작되고 있었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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