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낯선 남자가 "아이가 휴대폰 액정을 깨뜨렸으니 수리비 50만원을 지금 입금하라"며 전화를 끊지 못하게 압박했다. 금융감독원이 올해 2월 소비자경보를 발령하며 공개한 AI 음성 복제 피싱의 실제 수법이다. 울음소리는 인공지능으로 합성된 가짜였다.
추석 연휴는 이런 사기의 성수기다. 자녀가 어디에 있는지 서로 확인이 잘 안 되고, 은행 영업점과 콜센터가 멈춰 확인 전화를 걸기도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면,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지연이체와 여신거래 안심차단을 걸어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어다. 전화가 걸려온 뒤에는 이미 늦다.
◆ 보이스피싱 피해액 1조원 돌파, 1건당 5천만원
금융위원회 집계를 보면 2025년 1월부터 11월까지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1조1천330억원이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56.1% 늘었다. 같은 기간 발생 건수는 2만1천588건으로 15.6% 증가했다.
건수보다 금액이 훨씬 빠르게 늘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5년 1분기 1건당 피해액은 5천301만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88% 급증했다. 2023년 1인당 평균 피해액이 1천700만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한 번 걸리면 잃는 돈의 규모가 달라졌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전국 피해액은 2024년 한 해 8천545억원이었고, 2025년에는 9월까지 누적 9천867억원에 이르렀다. 기관사칭·대출사기형은 2025년 2만3천360건으로 전년 2만839건보다 12.09% 늘었다.
◆ 가족 사칭이 3분의 1…목소리까지 베낀다
금융감독원의 2023년 피해현황 분석에서 가족·지인을 사칭한 메신저피싱 비중은 33.7%였다. 대출빙자형(35.2%)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유형이다. 피해자 성별은 남성 55.0%, 여성 45.0%로 나뉘는데, 지인 사칭형에는 여성이 더 취약한 것으로 분석됐다.
여기에 AI가 붙으면서 수법이 달라졌다. 금융감독원이 공개한 사례를 보면 딸의 목소리를 딥러닝으로 복제해 악성앱 링크를 보냈다. "액정이 깨져 통화가 어렵다"며 앱을 깔게 한 뒤 휴대폰을 원격 제어해 예금을 빼내는 방식이다. 경찰청도 자녀 목소리를 복제해 납치나 휴대폰 파손을 핑계로 긴급 송금을 요구하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요구 금액이 50만원 안팎인 것도 계산된 설계다. 의심하고 확인 전화를 돌리기보다 일단 보내고 마는 금액대를 노린다.
귀로 가려내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숭실대 AI보안연구센터 관계자는 올해 2월 "AI로 생성한 목소리는 운율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악센트가 다른 특징이 있지만 인간의 귀로 이를 감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 대구 933건, 원룸에 갇혀 18억 송금 직전
대구경찰청 통계를 보면 대구 지역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2024년 704건에서 2025년 933건으로 늘었다. 1년 사이 229건이 증가했다.
대구에서는 40대 남성이 수사기관 사칭 조직에 속아 원룸에 일주일간 갇힌 채 지시를 받는 사건이 있었다. 18억원을 송금하기 직전 경찰이 출동해 피해를 막았다.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사기가 일주일 내내 사람을 통제한 경우다.
◆ 지연이체 3시간, 취소는 30분 전까지
지연이체 서비스는 송금을 신청해도 최소 3시간이 지난 뒤에야 상대 계좌에 입금되는 제도다. 금융감독원 안내에 따르면 처리 예정 시각 30분 전까지는 신청을 취소할 수 있다. 속아서 보냈더라도 2시간 30분의 되돌릴 시간이 생긴다.
생활 불편을 줄이는 예외도 있다. 지연이체를 걸어둔 상태에서도 건별 100만원 이하는 즉시이체로 따로 설정할 수 있다. 가족 송금이나 소액 결제는 종전처럼 쓰면서 큰돈만 늦추는 방식이다.
자동으로 적용되는 장치도 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100만원 이상이 입금되면 30분간 현금 인출과 이체가 지연된다. 사기범이 돈을 즉시 빼내가지 못하게 막는 제도다.
◆ 대출·계좌개설·오픈뱅킹 3단계 차단망
여신거래 안심차단을 신청하면 신용대출과 카드론 등 비대면 대출이 전면 차단된다. 명의가 도용돼 본인 모르게 대출이 실행되는 피해를 원천적으로 막는 장치다. 금융위원회는 시행 초기 가입자 가운데 60대 이상 고령층 비중이 62%였다고 밝혔다.
정부는 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서비스도 전 금융권에 도입했다. 내 이름으로 대포통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는다. 오픈뱅킹 안심차단까지 신청하면 다른 금융사 계좌를 무단으로 조회하거나 출금이체하는 것도 차단된다.
이미 피해가 났다면 금융결제원 어카운트인포에서 본인 명의 계좌 전체를 한 번에 일괄 지급정지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비대면 금융사기는 피해 회복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소비자가 미리 보안서비스를 신청해두면 사전 차단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밝혔다.
환급은 기대만큼 되지 않는다. 금융감독원 분석을 보면 2023년 피해액 1천965억원 중 피해자에게 돌아간 돈은 652억원, 환급률 33.2%에 그쳤다.
◆ 불편은 감수해야…연휴 전 신청이 관건
차단 서비스에는 대가가 따른다. 금융감독원도 지연이체를 신청하면 긴급 결제나 즉시 송금이 제한된다고 안내한다. 일부 안심차단은 해제 시 영업점을 직접 방문해야 한다. 금융소비자단체에서는 급하게 실시간 송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취소와 재송금 절차가 번거로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차단망이 작동한 흔적은 있다. 경찰청은 통합신고대응센터 긴급차단 시스템으로 피싱 번호 4만1천387개를 차단했다. 이어 악성앱 탐지로 2만4천706명에게 긴급 알림톡을 보내 추가 피해를 막았다.
올해 추석 법정 연휴는 9월 24일 목요일부터 26일 토요일까지 사흘이다. 일요일이 연휴와 겹치지 않아 9월 28일 월요일은 대체공휴일이 아니며 정상 근무일이다. 은행 영업점이 문을 닫는 날은 실질적으로 나흘이어서, 서비스 신청은 23일까지 마쳐두는 편이 안전하다.
정부는 이번 추석 연휴 기간 합동 24시간 피싱·스미싱 특별 감시 체계를 가동한다. 의심 전화를 받았을 때 할 일은 하나다. 끊고, 저장된 자녀 번호로 직접 다시 걸어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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