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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의 장소의 사색] 서울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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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서울관광재단 제공
덕수궁 돌담길. 서울관광재단 제공

서울은 고향이든 타향이든 명실공히 '우리'의 도시다. 우리나라의 수도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서울 (사는) 사람과 비서울 사람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 차이가 존재한다. 비서울 지역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서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좋든 싫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서울 공화국의 식민지 백성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게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먼저 이 글의 제목이 '서울의 달'이 된 까닭부터 말씀드려야겠다. 서민들에게 위안과 격려를 주는 대중가요들이 많이 있다. '서울의 달'도 그중의 하나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은 부부 음유시인이다. 작년 연말에 제주KBS가 열어준 그들의 50주년 기념 콘서트는 가히 기념비적인 공연이었다. 두 중진 가수의 평생 가수 생활의 집대성이면서도 허례허식 없이 알차고 실속 있는 콘서트였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조용필의 공연과 좋은 대비가 된다. 조용필 공연이 서울의 대공연장에서 대중들의 열띤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정태춘·박은옥 공연은 제주의 아담한 실내공연장에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제주도 쪽이 훨씬 좋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영혼의 쇄신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제주도가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점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 같다. 공연 광경을 보면서 형이나 누나라는 호칭으로 불러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가객이 정태춘, 박은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저무는 이 거리에 바람이 불고

돌아가는 발길마다 무거운데

화사한 가로등 불빛 너머

뿌연 하늘에 초라한 작은 달

오늘 밤도 그 누구의 밤길 지키려

어둔 골목 골목까지 따라와

취한 발길 무겁게 막아서는

아~~~ 차가운 서울의 달

한낮에 그림자도 사라지고

마주치는 눈길마다 피곤한데

고향 잃은 사람들의 어깨 위로

또 한 번 무거운 짐이 되어 얹힌 달

오늘 밤도 어느 산길 어느 들판에

그 처연한 빛을 모두 뿌리고

밤새워 이 거리 서성대는

아~~~ 고단한 서울의 달

밤새워 이 거리 서성대는

아 ~~~ 고단한 서울의 달

(정태춘, 「서울의 달」 전문)

방배동 거리. 깍뚜기 모양으로 전지한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방배동 거리. 깍뚜기 모양으로 전지한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정태춘·박은옥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사실은 "첫 번째 가창력은 역시 개성적이고 감응력 있게 타고나는 가수다운 음색이다"라는 것이다. 다른 음악적 재능이나 창의적 기교들은 그 다음 요목이 된다. 미성(美聲)이나 고음역(高音域) 발성은 가장 후순위 가창력 요소들이다. 정태춘 박은옥의 깊고 여운이 있는 음색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정태춘 박은옥 20년 골든 앨범』에는 「시인의 마을」(정태춘), 「회상」(박은옥)을 위시한 주옥같은 절창들이 무수히 많지만 나는 「서울의 달」의 담백함에 제일 마음이 끌린다. 「북한강에서」나 「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와 같은 비장(悲壯)은 없지만 소탈하고 소박한 동병상련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친근감이 드는 노래다.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가사와 곡조의 흐름이 좋고, 내가 젊은 시절 서울 변두리(방배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늦은 저녁 퇴근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걸어 들어올 때 느끼던 그 처량하고 막막한 심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좋다.

그런 강렬한 정화(淨化) 소구력(訴求力)을 가진 노래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다. 평택이 고향인 정태춘과 부산이 고향인 박은옥은 우리(아내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한 것 같다. 그 시절 그들도 신인 가수로 촉망받는 예술가의 생활을 개시했고 나도 그 무렵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의욕적인 소설가의 삶을 시작했다.

서리풀터널 위에서 내려다본 내방역사거리 전경
서리풀터널 위에서 내려다본 내방역사거리 전경

내게는 서울이 세 개의 장소로 나뉘어 각인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방배동과 그 직후 이사 가서 살았던 공릉동(태릉 육군사관학교 앞), 그리고 내 본적지(등록 기준지)인 정동길(덕수궁 돌담길)이 그 세 장소다. 서울에 갈 때마다 그 세 장소의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요즘 다시 방배동을 드나들고 있다. 맞벌이 부부를 부모로 둔 손자를 돌보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집에서 주 양육자 역할을 한 집사람이 손자가 서울로 올라간 뒤에는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살이를 하고 나도 가끔씩 보조자 역할이 필요할 때 상경한다.

방배동은 아주 많이 변했다. 우리가 셋방을 얻어 살던 곳은 이제 큰 아파트 단지가 되어 있다. 그 시절에 우리가 전세로 살던 곳의 아파트 가격이 수십 억대라는 말을 들었다. "이건 '서울의 달'이 아니라 '서울의 태양'이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폐선이 된 공릉동 철길(옛경춘선). 서울문화재단 제공
지금은 폐선이 된 공릉동 철길(옛경춘선). 서울문화재단 제공

공릉동에서 살던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다. 낮에 무료하게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해서 청계천 중고상가에 가서 14인치 흑백TV를 하나 사 왔다. 버스에서 내려 어깨에 메고 오던 중이었는데 마침 첫눈이 내렸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펑펑 내리는데 구두를 신고(퇴근길이었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다가 크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TV를 살리려고 몸을 던져 바닥을 뒹굴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내 머리통까지 내던져 구한 3만원짜리 TV를 보더니 아내는 "원래 나는 혼자 TV 보는 거 안 좋아한다"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덕수궁 돌담길 끝에 있는 '서울시 중구 정동 22번지'는 옛날 문화방송(MBC) 주소였다. 요즘은 도로명 주소로 '정동길 3'이고 경향신문 주소다. 그곳이 내 본적지다. 아버지가 제주도로 피난 갔다가 식구들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와 이것저것 도모할 때 만든 본적지다. 왜 그 자리를 본적지로 삼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아마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이 단체로 그곳을 본적지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일행 중 재수가 좋았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서울에 마련할 수도 있었다고 들었다. 전쟁 직후라 빈 땅이나 싼 땅이 군데군데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요행이 뒤따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를 넘겨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가 혈혈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아버지를 데리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방배동 신축 아파트 전경. 호가가 한 채에 수십 억씩 한다.
방배동 신축 아파트 전경. 호가가 한 채에 수십 억씩 한다.

이곳 정동길을 내 발걸음으로 처음 걸어본 것은 고등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종친회 장학금을 수령하기 위해서 밤새 기차를 타고 와서 이 길을 거쳐서 길 끝에 있는 종친회 사무실로 갔다. 나이 들어서는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공기관에 심사나 출제를 위해서 몇 번 드나들었었다. 최근에도 대구로 내려오기 위해 방배동에서 서울역으로 가다가 버스에서 내려 한 번 걸었다.

소설가·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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