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제인-이원만 코오롱명예회장(1)

**최고회의 방문부탁**골프장에 들어선 박정희대통령은 이원만에게 내기로 코오롱대구공장을 걸라며 농담을 해왔다. 그러자 이원만은 곧바로 받아서는 "대신 내가 이기면 청와대를 주시오"라고 응대, 박대통령을 움찔하게 했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아무나 할수 없는 불경스런 농담이었다. 당연히 질수밖에 없었던 이원만은 마지막 홀을 돌고난뒤 "코오롱대구공장은 이제 각하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더욱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기발한 청탁을 했다.

이원만의 배짱과 기지를 알게하는 일화다.

박정희와 이원만의 만남도 이원만의 배짱에서 비롯된다.

군사혁명다음해인 62년 봄 최고회의는 경제간담회에 경제인들을 초청했고이원만은 경제인협회 이사자격으로 참가했다. 이자리에서 박정희의장은 우리나라가 어떻게하면 잘사는 나라가 되겠는가며 농업국가로 가야할지 공업국가나 상업국가로 진로를 잡아야 할지 물어왔다.

그러나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데다 자칫 실언을 하여 화를 자초할까 두려워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박정희의장의 재촉이 있고서야 한두사람이 발언을 했다. 자원이 부족한만큼 덴마크처럼 농업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들이었다.

혁명기치로 부강을 내세웠던 박의장에겐 실망스런 의견들이었다. 이원만이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농업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매달리다간 국제사회에서 낙오될 수 밖에 없다며 일본을 예로 공업국가로의 방향을 주장했다."일본은 자원이 없지만 세계가 놀랄만치 발전하고 있다. 바로 인적자원덕이다. 우리민족은 일본보다 우수하다. 싼 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면 해외시장에 내다 팔 물건은 무진장이다. 식량의 자급자족에만 신경을 쓰기보단외국기술을 도입하고 재일교포들의 자금을 끌어들여 공업발전에 눈을 돌려야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업입국을 강조한 이원만은 박정희의장으로부터 다음날최고회의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게됐다. 박의장을 다시 만난 이원만은 우선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했고 그 결과 한국수출산업공단 이른바 구로공단이 탄생했다.

이날 최고회의 정문에서 저지를 당해 약속시간보다 늦게 박의장을 만난 이원만은 공단조성을 건의하기전에 의외의 요구를 먼저 꺼냈다. 시간절약을 위해 연락비서관을 임명해달라는 요구에 박의장은 곧바로 박태준을 연락비서관으로 임명, 이원만의 최고회의 출입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원만을 항상 이선생으로 부른 박정희는 그의 넉살좋은 입담을 좋아했고이원만은 진한 입담으로 대통령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주곤했다. 대통령 박정희를 만나서도 이원만은 스스럼이 없었다고 주변인사들은 증언한다. 회의시탁자에놓인 과자를 남기지 않았고 외도를 하다 박대통령의 호출에 늦어지고서도 늦은 이유를 숨김없이 이야기할 정도였다.

승부욕이 강하면서도 미련을 두지않았던 점도 그의 한 단면이다. 동대구역을 유치하고 지역구인 대구동구 구석구석에 공을 들이고서도 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방한 이원만은 선거참모들이 대구쪽으로는 쳐다보기도 싫다며 섭섭함을 토로할때 귀에 자물쇠를 채우면 다 지나간 일이라며 되레 위로를 하기도했다.

고향 영일에서 산림기사보를 할때나 일본서 작업모로 첫 사업을 시작할때도배짱과 아이디어가 재산이었고 제2의 고향인 대구에서나 이후 서울생활에서도 그는 늘 아이디어맨이었다.

**기르는 어업 주장**

현대그룹의 정주영회장같은 이도 "아이디어는 이원만이 최고"라는 평을 서슴지 않았을 정도다. 전신주와 침목을 나무대신 시멘트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나 어업도 이제는 기르는 어업을 해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로선 웃음거리였다. "산아제한을 계속하다가는 식모구하기도 어려워진다"고 했다가 여론의 호된 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가 예언한 인력난은 지금 우리산업의 최대 고민거리가 되어있다. 참의원당시 나무대신 프로판가스를 연료로 사용해야한다고 역설, 국회에서 '프로판가스'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보통학교출신인 그의 아이디어는 앞서갔다.

국회상공위원당시 박대통령이 장관들의 호화판 술자리를 경계했을 때다. 경제정책을 이야기하던 모 장관이 공무원은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그는 반대입장을 보였다. 공무원은 물론 장관들도 술을 마셔야 여론을 듣고 정책에 반영할수 있다는 요지였다. 후일 그 장관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은 "내가 언제 술을 먹지 말라고 했나. 요정출입을 하지 말라고 했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윤보선추천 참의원**

해방과 함께 귀국한 이원만은 곧 정계와 인연을 맺었다. 한민당에 가입, 조병옥을 따르며 유진산과 허물없는 사이를 유지했고 윤보선의 추천으로 참의원을 하기도 했다. 해방전 일본서 작업모로 떼돈을 벌어 장만한 대구 진골목의대지 7백여평 '대궐같이 넓은집'은 한민당 인사들의 사랑방이었다. 공화당에입당해서도 김용태, 백남억등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았다. 이때문에 그는색깔이 불분명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할수밖에 없었던 사업가 이원만의 정치적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이원만은 여러방면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사업을 하면서도 교육자, 예술인들을 사귀었다. 그래서 당시 이병철회장을 비롯한 경제인들의 친목단체인 장수회 대신 예술계 교육계인사들이 많았던 장춘회에 가입, 그들과 골프를 즐겼다. 대구기업가로는 여상원, 이순희와 절친했으며 이병철과도 자주 만났다.이정림, 조홍제, 박흥식과도 스스럼이 없었고 특히 이정림은 이원만에겐 둘도없는 친구이자 동지였다.

일본생활탓에 공석에서도 일본어가 튀어나와 구설수를 타기도 했고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사투리가 어찌나 심했던지 사돈지간인 김종필은 '우리나라에서 사투리를 잘쓰는 사람의 하나'로 이원만을 꼽기도 했다.

**7년째 투병생활**

1904년 영일군 신광면에서 태어나 산림기사보, 신문배달원, 직공등을 거쳐오늘의 코오롱그룹을 이룬 이원만은 이제 아흔이 넘는다. 일흔이 넘고서도염문을 퍼뜨릴 정도로 건강을 누렸던 그였지만 지금은 병상을 지킨다. 7년전노환으로 쓰러진후 계속된 투병생활이다. 그를 30여년간 그림자처럼 지켜온이영호씨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의사표현도 할수없다"고 전한다. 그통에 간혹 병문안을 오겠다는 이에게는 옛모습을 기억하라며 만류하고 있다.4년전 부인 이위문의 임종조차 알지못한채 누워있는 이원만을 효자로 소문난이동찬회장은 매일 찾아와 손도 잡고 머리도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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