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춤추는 숲90

동유를 쏘아보던 시선을 깔아내리고 얼마간 잠자코 앉아있던 허록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설득조이기도 하고 애정섞인 말투이기도 하였다.

"동유야, 하나를 위해 명분을 포기해선 안된다. 할일을 위해 그 하나가 희생될 필요가 있어"

그것으로 얘기는 더 진행될 수는 없었다. 허록이 피아노앞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 후로도 허록이 동유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유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록이 자신을 키우고 음악을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의 음악이 여하한 의미를 갖는다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행로에 영향을 가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날 허록이 자신을 불러 집을 나가라고 할지 모른다는 예감을 느끼는 가운데,동유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연습실이나 책장 아래에 꽂아둔 동유의 악보를 허록은 웬지 없애지도 않았다.동유는 헤어질 빌미라도 찾듯 악보를 들추어보지만 전혀 손이 간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기야 어떤 다급한 일이 있어도 금방은 내색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허록이아닌가. 아니 어쩌면 동유의 행위를 용인했을지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와 같은 애매한 날들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

연습실에서의 논쟁 이후 사흘째되는 날 몸이 아프다고 허록이 드러누웠다.몸살기운이 있다더니 하루종일 면이불을 덮고 있는데, 얼굴이 겉보기에도 상당히 핼쑥해진 모양이었다. 동유로서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증세를 캐물어 조제해온 약을, 그러나 허록은 먹는 시늉만 할 뿐이어서약봉지가 방안에 뒹굴었다.

허록이 방에 누운지 사흘째였다.

"동유야, 오늘 토요일이지? 큰일났구나. 마산에 내가 나가는 업소 있지. 9시에 반주약속이 돼있는데"

"아픈데 어떻게 나가요? 제가 연락할께요"

"아냐, 이제 마지막 남은 일자린데, 약속을 어길수 없다. 너한테는 절대 이런 부탁 안하려고 했는데, 나대신 네가 좀 가줄 수 없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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