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기홍칼럼-중국 인상기

**장삿속밝은 중국인**상해 거리에는 {트롤리}라는 자동차 모양의 전차가 달리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공항에 마중나온 남경대학의 이박사는 도로변에 높다랗게 걸린 광고판을가리키며 저 많은 것이 모두 아파트 광고인데 구매력이 없어 늘 광고만 붙어있다고 말했다. 임시정부 옛청사에 들어서니 입장료는 60원(우리돈으로 약 6천원)이나 받는데 직원은 전혀 한국말을 모른다. 뚱뚱한 중국여인이 지극히서툰 한국말로 안내를 해서 마음이 언짢았다. 기부금 대장에 보니 다수의 한국인 방문객들이 돈을 놓고 갔다. 순진한 한국인과 장삿속에 밝은 중국인의대조다.

기차 특실을 연석(연석)이라 하는데 연석표를 사면 특별 출찰구를 통해서 특별 대합실로 들어가서 특실에 앉게된다. 돈만 더 내면 사람대우가 아주 달라지니 언제부터 중국이 이렇게 되었는가. 김포-상해간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한국청년도 소주에서 자수공장을 한다고 했는데 기차 대합실에서 만난 터키청년도 역시 자수품 상인이라 한다. {비단장사 왕서방}의 고장인 소주를 거쳐남경까지 가는 우리 기차는 이층이었다. 차칸 정면에는 붉은천이 옛날 그대로붙어있다. 본래는 {모택동 주석 만세}라는 구호가 쓰여있던 천이다. 지금은{이 기차는 전공표 현광등을 사용한다}는 형광등 광고가 쓰여있다. 자본주의가 정면에 나선 것이다.

남경역에 도착하니 남경대학의 한 여직원이 마중을 나왔는데 그와 잠시 환담하는 동안 그가 바로 모택동 치하의 문화혁명 피해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자기 나이가 40대라면서 공부를 중단하여 학자가 못된 것은 문화혁명 탓이라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은 학업을 전폐하고 공장이나 농촌으로 나갔다 한다.**모초상화는 여전**

지식인은 타도의 대상이었고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때의 풍조였다는 것이다. 1966년부터 10년간의 문화혁명 기간에 모택동 저작집은 40억권,모택동 배지는 80억개를 찍어냈다 한다. 모택동 우상숭배는 극도에 달하여{새로 꾸민 방 흰벽에 건 모주석 초상화, 님을 바라보니 마음이 밝네. 어르신네 모시니 마음 훈훈합니다. 바라볼수록 더 보고 싶고 볼수록 마음은 기뻐요, 환호하세, 노래하세, 우리마음속의 붉은 태양을!}하는 모택동 찬송가도생겨났었다고 낭랑한 중국말로 그 노래를 들려 주었다. 문혁때 무수한 사람들이 반동에 몰려 희생되고 피해를 보았으니 우리 풍토같으면 모택동 사후에는그를 쓰레기 통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북경 천안문 광장에는 모의 초대형 초상화가 여전히 붙어 있다. 체제 유지에 그를 이용하면서 내용으로 자본주의를 해가는 것이다. {흰 고양이건 검은고양이건 쥐만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식의 중국이다.

**자본주의병 역력**

남경대학 안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데 특별히 한국 손님들을 위해 중국식고추장이 나왔다. 호남성, 사천성, 강서성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잘 먹는데호남성에서는 모택동이 났고 사천성에서는 등소평이 났으므로 맵게 먹는 고장에서 혁명가가 난다는 말이 있다 한다. 식사후 구내 호텔로 안내되었으나난방이 빈약하여 시내로 옮겨야 했는데 같이 택시를 탔던 중국인 교수는 교문수위에게 싱긋이 웃으며 주차료를 주고 영수증을 받았다.

교외의 차량에 대해서는 차가 교문을 나갈때 돈을 받는다. 진교수가 웃는 까닭은 공산주의 시절에는 없던 것이 자본주의가 되면서 매사에 돈을 가지고 주고 받게 되니 멋적다는 것이었다. 택시운전사 옆좌석에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타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저녁때나 밤에는 운전사 부인이 동승하여 택시강도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로 가는 병을 앓고 있음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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