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월드컵무대에 나서기까지는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한국은 {세계인의 축구잔치}인 월드컵에서 언제나 객의 역할밖에 할 수 없었고 간혹은 문앞을 기웃거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세계의 벽은 우리가 올려다보기조차 힘겨울만큼 너무나 높아보였다.이제 한국의 4번째 월드컵. 54년 스위스월드컵에 첫 참가한 이후 40년이 흘러갔다. 그 세월만큼 한국의 실력도 세계수준에 꾸준히 근접했다.땀과 한으로 점철됐던 한국의 월드컵도전사를 살펴본다.
54년 아시아국가에도 월드컵문호가 개방됐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한국은 일본과 지역예선을 벌여 1승1무(5대1, 2대2)를 기록, 사상 첫 출전권을획득했다.
미군항공기를 빌려타며 6일동안 여행끝에 스위스에 도착한지 하루만에 헝가리와 맞붙었다.
한국은 센터포워드 최정민, 센터하프 민병대등을 내세워 분전했지만 우승후보 헝가리와는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9대0, 월드컵사상 최다점수차이로기록된 참패였다.
2차전 터키와의 경기도 7대0 참패. 이렇게 월드컵의 첫장을 열었다.58년 스웨덴월드컵은 대한축구협회 직원의 신청서류분실로 불참할 수 밖에없었고, 62년 칠레월드컵은 지역최종예선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2패(1대5,1대3)를 기록, 또다시 참가가 좌절됐다.
66년 북한은 당시 한국에 비해 몇수위의 전력을 보유했다. 정부는 지역예선에서 북한에 패할 것을 우려, 우스꽝스럽게도 불참을 선언해버렸다.70년 멕시코월드컵지역예선은 한국과 호주의 다툼이었다. 한국은 마지막 호주전에서 져 멕시코행은 좌절됐다.
74년 서독월드컵에서도 신예 차범근과 꺽다리 김재한의 분전에도 불구, 또다시 호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0대2완패.
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예선전직전 한국은 이란.쿠웨이트의 중동세에 밀려2승5무1패의 예상밖의 성적으로 또다시 탈락했다.
82년 스페인월드컵도 다시 오일달러로 무장한 중동세에 밀려 월드컵 5수생으로 전락했다.
드디어 86년 32년만에 감격의 월드컵 티켓을 움켜쥐었다.
본선에서 첫경기 그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에 3골을 내주며 추락하는순간 박창선의 25m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첫 포문을 열었다.다음은 불가리아전. 골키퍼 오연교의 펀칭미스로 1골을 내줬지만 막내 김종부의 슛으로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 전반7분 1골을 빼앗겼지만 최순호의 대포알슛으로 1대1로 전반을 끝냈다. 후반에 2골을 먹고 허정무의 뒤늦은 추가골로 2대3으로 패했지만 한국축구의 저력을 보여준 대회였다.
90년 월드컵 벨기에와의 첫 경기에서 무려 78차례나 볼을 빼앗기는 졸전끝에0대2의 참패.
두번째 스페인전에서 전반 43분 황보관의 대포알슛으로 1대1 동점을 이뤘으나 미첼에 해트트릭을 내줘 1대3으로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경기인 우루과이전에서도 경기종료 몇초전인 후반 45분 1골을 내줘0대1패. 3패의 참담한 성적과 함께 {종이호랑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쓸쓸히귀국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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