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14)

나는 현관 계단을 오르다 이끌리듯 마당 한켠의 꽃밭을 바라보았다. 그래도계절은 바뀌어 우리 집 꽃밭에도 봄은 와 있었다. 붉고 흰 장미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내가 심은 제비꽃도 자주빛 수줍음으로 다소곳이 피어 있었다.내가 왜 제비꽃을 심었을까. 양치기 소년 아치스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소녀 이아를, 해의 신 아폴로가 질투하여 이 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제비꽃을. 식물도 생각한다는 이른바 백스터 류의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바흐와 모차르트, 재즈를 좋아하고 록 음악을 싫어한다는 꽃.지난 한식 때 어머니의 무덤에 한다발 장미와 안개꽃을 바치고 터덜터덜 하산하던 날, 나는 자드락 길섶에서 함초롬히 무릴 지어 피어 있는 이 제비꽃을보았었다. 그때의 정겨움이란 어쩌면 내가 그 제비꽃 속에서 이아처럼 사랑에 빠지고 싶은 나의 외로운 그림자를 본 건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모차르트의 가곡{제비꽃}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소녀에게 꺾여 그녀의가슴에 꽂히기를 바랐던, 그러나 무심한 그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던 제비꽃의 가여운 넋을.

[하필이면 오랑캐꽃이니]

어느날 내가 은유에게 그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 주었을 때, 은유는 뜨악한 표정으로 이죽거렸었다. 은유가 왜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안다.꽃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은유가 설마하니 그 꽃을 싫어할 리는 만무하고,아마도 내 궁상이 듣기 싫었던 게다. 턱없이 감상적인 나의 궁상.나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놀라듯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현재세 개의 방을 쓴다. 아버지와 작은오빠가 안방을 쓰고, 큰오빠가 중간방을 쓰고, 언니와 내가 건넌방을 쓴다. 두 개의 방이 더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 중 하나는 작은 오빠의 방이다. 원래 그 방은 나의 방이었다. 그런데 작은오바와 함께 중간방을 쓰던 큰오빠가 대학생이 되면서 차츰 담배도 피우고 운동권으로 터를 잡자 낙심한 어머니께서 나의 양해를 구했다. 나는 작은오빠를 위해 기꺼이 그 방을 양보했다. 아직도 그 방에는 작은오빠의 체취와 일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문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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