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16)

그 만년필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께서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걸 불쑥 내밀며 말씀하셨다.[어때 ? 선물이 마음에 드냐?]

[아빠두, 참. 요새 누가 이런 걸 써요, 귀찮게]

실망한 내가 자발없이 투정을 부리자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참 허허로운 웃음을 뿌리시다간 이렇게 능갈쳤다.

[볼펜 글씨도 글씨냐. 요새 애들은 편한 것만 좋아해서 큰일이야. 글씨란모름지기 붓이나 펜, 하다못해 만년필 정도는 돼야지. 명색이 장차 시인이되겠다는 녀석이... 싫으면 관두고]

나는 아버지의 뚱딴지 같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성의를생각해서 받아두었다. 그러나 나는 곧장 내 책상 서랍에 쑤셔넣어 버렸다.그후 나는 한 번도 그걸 꺼내보지 않았다. 내가 우련한 기억속에서 그 만년필을 건져올린 건 작은오빠의 메시지를 보고난 직후였다. 그것은 곧 나를 흥분시켰고, 시나브로 아침의 참담한 기분을 씻어 내려 주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유달리 착잡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전과 다름없이 주방 식탁에 둘러앉아 시적시적 수저를 놀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째 큰오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 늦도록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계신 탓인지 그때까지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가슴에 달아드릴 꽃을 준비해 두고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가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끝내 일어나지 않으셨다. 기다리다 못한 언니가 먼저 출근을 했고, 나는 지각을 각오하면서까지가방을 둘러멘 채 버티고 있었다.

[승혜야, 안되겠어. 이따 내가 아버지께 다 말씀드리고 대신 달아드릴게. 어서 가]

이윽고 작은오빠가 재우쳤다. 작은오빠의 손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현관을 나섰을 때, 나는 기어이 한움큼의 눈물을 쏟뜨리고 말았다. 고샅 입구에는 언제나처럼 은유가 나를 기다리며 서 있었고, 나는 은유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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