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내 곳곳 대형현수막.연일 특집방송

25일은 파리가 나치압제 4년에서 해방된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이날 파리시내는 각종 축하행사와 페스티벌.공연등이 펼쳐지고 TV등 각종매스컴들은 {그날의 감격}을 되새기는 프로그램과 보도를 연신 내비치고 있다.또 파리시내 곳곳엔 대형아치와 기념광고등이 나부껴 {당시의 환희}를 오늘에 되살리고 있다.파리는 나치치하에서도 어떻게보면 바르샤바봉기때의 폐허와 살육에 비하면천만다행으로 에펠탑을 위시한 수많은 문화재와 유물들을 훼손없이 보존한{행운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드골장군의 지도력을 믿는 자유프랑스군 활약과 게릴라활동으로 막강독일군의 배후를 공격했던 레지스탕스의 끈질긴 저항의식과 항전결의가 독일군의 만행을 저지시킬 수도 있었지만 당시 독일군 파리점령사령관이었던 콜티츠중장의 현명한 결단이 파리의 불행을 막았던 결정적인 계기였다는데 많은사학자들은 이의를 달지않는다.

콜티츠중장은 44년6월6일 노르망디상륙성공으로 승기를 거머쥐면서 남하하고있는 연합군들의 진격을 막고 전열을 가다듬기위해 히틀러총통으로부터 {파리초토화} 명령을 하달받고 있었다.

그는 노틀담 루브르 개선문등 자신의 말한마디면 폭파될 운명에 있었던 문화재들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중립국신분이었던 스웨덴 영사를 면담, 연합군의파리공격을 앞당겨달라는 부탁을 하면서까지 프랑스 문화재를 지켜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파리시는 45년 그에게 {감시장}을 수여할정도로 파리는 적장의 분별력있는 결단의 힘에 의해 참화를 겪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해방을 위해 숨져간 3천여명의 레지스탕스 희생자들의 헌신과 희생은 그만큼 파리 수복을 앞당겼고 연합군들의 진격을 촉진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반면 페뗑원수를 수반으로한 비시정권은 프랑스의 구국정신을 손상시킨 유화적 태도로 숱한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이같은 비시정권 추종자와 나치협력자 1만여명은 44년 8월25일 파리시내에서여성은 삭발을 강요당하는등 숱한 린치와 박해를 당해야했고 그에 따른 전범및 반인륜법재판은 지난번 투비에 재판에서처럼 오늘날까지도 단죄에 따른 처형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올 79세인 투비에는 나치치하 리용에서 유태인 7명을 게슈타포요원에게 인계해 처형케했던 죄목으로 50년이 지난 지난3월 법원으로 부터{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있다.

샹제리제가를 드골장군을 정점으로 자유프랑스군참모들이 행진하고있는 지난44년8월25일 사진은 파리시내곳곳에 부착되어 침략자를 쳐부수고 자유를 지켜낸 장한 파리지엥(파리시민)의 애국정신을 상징하고있다. 어디까지난 파리해방 주역은 파리시민이고 조역은 연합군들의 입성이라는 데두고 그들은 대단한 시민자존의식을 지켜나가고있다.

오늘도 TV에는 {파리해방은 영원한 파리시민의 명예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일대 이벤트였다}란 구호를 강조하는 당시 다큐멘터리 프로가 계속 방영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후 친일파중용, 독립지사 홀대등으로 민족정기가 희박해진 우리의 처사와 비교해볼때 이번파리해방행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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