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

슬픔이 자라는 밤-21설령 내가 그냥 꺼내보고 집어 넣어 둬도 언니가 전혀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나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놓여져 있는 위치, 모양새, 각도 등을 잘 눈여겨봐 두었다가 살그머니 꺼냈다. 맙소사, 어느 날의 일기를 보았을 때 나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열렸다. 나의 가슴은 연방 뛰었고, 그 행위를 결코 이해할수 없었다.

만일 나라면 일기장이 아니라 그 어떤 곳에도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정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못 견딘다면 누가 봐도 알 수 없게, 나만이알고 있는 숫자나 암호로써 은밀히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니는안 그랬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한글로,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촘촘히적어 두고 있었다. 나는 낯이 뜨거워 도저히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꼭 배신당한 기분이었고, 왠지 억울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그때부터 나는 언니가 예사로 뵈지 않았다. 나의 눈에는 언니가 형편없는 여자로 비쳤다. 그 다음부터 나는 언니와 한 침대에서 자지도 않았고, 말도 안했고, 목욕도 같이 가지 않았다. 그러한 나의 결백증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는데, 아둔한 언니는 끝내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나의 토라진 행동이 자신이일기를 훔쳐본 것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쬐끄만 기집애가 속이 고렇게 좁아빠져서 어디다 쓰겠니. 그냥 한번 슬쩍넘겨본 걸 가지고.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내꺼 봐, 자]

참다 못한 언니는 내 책상 위로 자신의 일기장을 휙 집어던졌다. 물론 내가보지 않을 걸 계산에 넣은 허세였다. 나는 같잖아서 속으로 비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언니는 나쁜 여자야.

그러나 나는 언니가 불쌍해서 그 비밀만은 지켜 주었다. 아직까지 언니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인 것은 그일기 속의 주인공이 지금의 형부될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조바심이 돋아 지며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입술은 갈잎처럼 타들어갔고 자정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서는 초침소리가 문신을 새기듯 아려왔다.그때였다. 어지럽게 발자국을 찍으며 들어서는 언니의 기척이 귓불에 닿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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