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들어 육상은 구기종목에 밀려 쇠퇴기미를 보이지만 50년대부터 활약해오던 쟁쟁한 선수들은 전국대회에서 경북육상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었다.1960년 10월 대전에서열린 제41회 전국체전에서도 경북팀의 강세는 50년대못지않게 여전했다.
단거리부문 대표주자는 정기선과 손경수.
엄팔룡의 뒤를 이어 경북육상 단거리부문을 전국최강으로 군림하게 한 정기선은 1백m한국기록보유자. 1950년대 중반이후 단거리에서 이렇다할 적수를만나지 못했던 정기선은 41회전국체전서도 10초8로 1백m우승을 차지, 경북팀에 금메달을 선사했다.
36회 전국체전 4백m에서 우승한후 경북단거리계의 스타로 부상한 손경수역시 2백m에서 22초1로 우승했다.
3천m장애물경기에 출전한 이복식도 경북팀의 자랑거리. 39회, 40회 전국체전에서 이부문 2연패를 했던 이복식은 41회대회마저 9분34초4로 우승, 3연패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10종경기에 출전한 권대석도 지난대회 김경룡의 우승에 이어 3,872점으로금메달을 목에 걸어 이 종목의 대를 이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대회의 꽃 마라톤.
경북팀 대표로 출전한 선수는 영남고 대구대를 거친 주형결이었다.그는 이 대회에서 충북의 한재덕과 각축을 벌인 끝에 2위로 골인, 전국체전 첫입상의 기쁨을 안았다. 이후 주형결은 이창훈의 뒤를 잇는 경북마라톤의 간판주자로 활약, 1964년 동경올림픽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를 이어경북마라톤에는 김차환 강명광 등이 뒤따랐고 남인규 채홍락 김주룡 등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국무대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왔다. 한편 당시 마라톤경기에 쏠린 관심은 요즘의 열기 이상이었고 경기장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선수외에는누구도 코스에 들어올수 없는 요즘과는 달리 선수와 코치,응원단이 뒤섞여 난장판을 방불케했던 것. 선수의 뒤를 따르는 코치와 응원단은 구령과 고함으로도 모자라 빈깡통을 두들기며 요란스럽게 응원하거나선수가 정신을 차리도록 물을 끼얹기도 했다.
대전역앞을 출발,유성온천을 왕복한 41회 전국체전 마라톤경기도 이같은소동이 코스내내 계속됐다.
당시 경북팀 코치였던 이경철씨는 "다른 팀들이 모두 깡통을 두들기며 선수를 격려하는데 경북팀도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지요. 어렵사리 지프차를 구하고 팔이 아프도록 빈깡통을 두들겼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장면이었지요"라고 설명했다.
1961년 11월 서울서 열린 경부역전경주대회에서는 경북육상의 저력이 다시한번 확인됐다. 당초 경북은 체육회예산이 부족해 수년간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대회참가신청 마감을 하루 앞두고 긴급히 경북체육회 이사회가 소집됐다.
다음해 전국체전을 개최하는 경북이 경부역전경주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체면문제라는 여론이 분분했던 까닭. 회의결과 결국 대회참가가 결정돼이경철씨가 급히 밤차로 상경, 선수확보와참가신청문제를 처리하게 됐다.이경철씨는 "선수구성이고 뭐고 아무 대책도 없었지만 예산문제를 경북도와협의, 어떻게든 확보하겠다는 말만 믿고 무작정 서울에 갔습니다. 우선 이창훈의 하숙집을 찾아가출전가능한 선수를 꼽아보고 나름대로 선수진을 구성했습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대회참가신청 마감일인 이튿날이씨는 서울서 선수생활을 하던 주형결 강명광등에게 연락, 이같은 사실을 설명하고 팀합류동의를 받은뒤 참가신청을했다. 너무나 급하고 무모한 대회참가라 성적은 기대도 못하는 실정인데다오히려 13~15명의 선수진을 구성하는 것이 시급했다.
경북팀은 서울에 있는 선수들과 대구의 김차환 등에 고교선수까지 일부 채워 어렵사리 선수진을 구성했다. 연습도 작전계획도 없는 엉성한 팀이었지만참가선수 대부분이 쟁쟁한 장거리스타들이었다.
결국 이들의 저력이 뒷받침된 경북팀은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 이 대회에 얽힌 얘기는 두고두고 육상계의 화제가 됐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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