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빠엄마 일기-작은 행복

서둘러 청소며 빨래를 끝내고 녹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으니 모처럼 한가하다.어느새 한낮의 햇살들이 베란다를 지나 마루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누웠다.마당 한켠에 여름내 무성한 잎으로 우리집 식탁을 오르내리며 고향의 내음을전해주던 호박잎들은 노오란 꽃들을 바쁘게 피워내고 있다. 내딴엔 열심히물도 주고 거름도 주며 정성을 다했건만 호박이 열리자마자 툭 떨어져버리곤해서 안타까왔는데 은행나무로 올라간 넝쿨사이에 쬐끄만 호박 하나가 살짜기 숨어 있어 나를 기쁘게 한다. 혹 작년처럼 동네 개구장이들에게 수난을겪을까봐 아침 일찍 나만 살짝 들여다보곤한다.

재작년이던가. 시장에서 1천5백원에 사온 작은 대추나무, 뿌리도 몇가닥없이 말라비틀어져 잘 자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어느새 내 키만큼이나 자라나 아이들 엄지손가락만한 대추들이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려있다.혼자 즐기기엔 너무 아까워 추석연휴에 모처럼 늦잠을 자는 딸아이를 깨워마당으로 데려갔다. 은행나무사이 호박을 가리키며 "호박이 익을때쯤 단풍도 들겠지?"하며 자랑했더니 딸애는 퉁명스레 "안경이 없어 안보여요" 한마디하곤 들어가버린다.

무안하고 섭섭함도 잠시, 입시지옥을 갓 벗어난 딸애가 그간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저리 감성이 무디어진 것이 어찌 그애만의 탓일까. 내게도절반의 책임이 있는것을…. 그래도 대추가 익고 국화가 필때면 그애의 무딘감성들도 고개를 들겠지. 모두가 바쁘기만한 이 삭막한 도시한가운데서 그래도 난 풍성한 가을을 준비해야겠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