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바둑산책-이창호와 류시훈(2)

이창호(이창호)와 류시훈(유시훈)의 특별3번기가 기획된 것은 두 사람을라이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이벤트를 통해 두 사람을 라이벌 관계로 만들어 가려는 매스컴의 센세이셔널리즘도 적지 않게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두 사람을 라이벌이라고 묶어서 부르는 것은, 아직은 좀 어색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까지 아무런 은원관계가 없다. 타이틀을빼앗거나 빼앗긴 적이 없으며 같은 무대에서 똑같은 하나의 목표를 놓고 경쟁을 벌인 일도 없다. 이렇게 볼때 이번 특별3번기는 작위성이 너무 드러나버린 행사가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을 라이벌로 만들기 위한 근거를 굳이 찾자면 얘기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4년 무렵이다.

이창호는 아홉살이었고 류시훈은 열세살이었다. 전주(전주)의 신동이었던이창호는 전주에서는 더 이상 자신을 가르쳐 줄 스승을 찾지 못해 전영선(전영선) 칠단의 손을 붙잡고 서울로 올라와 한국 기원 연구생에 적을 올린다.그때 신천중학교 1학년이던 류시훈은 이미 한국기원 연구생이었다.두 사람은 그 전해, 그러니까 83년 여름에 첫 상면을 했었다. 제4회 해태배 어린이 바둑대회 8강전에서였는데 거기서 류시훈은 이창호를 꺾고 그길로우승까지 내달렸다. 이듬해인 84년, 제3회 어깨동무 바둑왕전 결승에서 두사람은 재회를 했다. 이번에는 이창호가 류시훈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기원 연구생이 된 두사람은 연구생이 되어서도 1, 2위를 다투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꿈나무로 성장했다. 창호는 시훈을 형이라고부르며 따랐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갖고 경쟁했던 시간은 83년 혹은 84년부터 86년에 이르는 약 3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기간동안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성적 1, 2위를 다투고 있었으니 두 소년 가운데 과연 누가 먼저 프로입단을 하느냐 하는 것은 자연히 바둑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 3년동안 두소년은 라이벌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그러던 두 소년이 돌연 진로(진로)를 달리한 것은 86년의 일이었다. 이창호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당대의 제일인자 조훈현 구단의 내제자가 되었고 곧바로 입단의 관문을 통과했다. 연구생에서는 일년에 두명씩 입단을 할수 있었는데 이창호와 함께 입단에 성공한 소년은 류시훈이 아니라 김원(김원.현 프로 오단)이었다.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었던 류시훈은 여기서 스스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집안에서는 오히려 완강히 반대를 했지만 류시훈은 고집을 꺾지 않고, 윤기현(윤기현) 구단의 주선으로 일본기원의 해외담당이사 오에다(대지웅개)구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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