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은 사상 유례없는 한일 공동개최란 첫 선례를 만들며 FIFA의 군주로 군림해온 아벨란제 회장에게 뼈 아픈 일격을 안겨 주었다. 이는 FIFA에잠재돼 있던 반 아벨란제 분위기의 표출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벨란제는 앞으로 보다 강한 반아벨란제 세력의 거센 도전을 받을가능성이 높아 축구계 대부로서의 그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아벨란제는 80세란 고령에 따른 그의 쇠락을 반영하듯 이번 한일공동 월드컵개최를 발표 한 후 현장에서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 공동개최안은 사실상 유럽을 주축으로 한 반아벨란제 그룹과 남미를 중심으로 한 아벨란제 지지세력과의 대결로 압축된 양상을 보여 관심을 끌었다.
아벨란제는 FIFA 집행위원 개인별로 접촉하며 눈물 읍소 작전까지 벌이며 일본 단독 개최를 고집했으며 공동개최는 막판까지 의제에 올리지 않으려했었다.따라서 일본은 실제 패배의 분위기이며 한국은 그나마 성공했다는 기분을 나타내고 있다.이는 한국이 유치전략에서 일본보다 더욱 치밀했다는 분석도 가능케하고 있다.
일본의 발목을 잡은 가장 큰 요인이 결과적으로 바로 아벨란제가 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벨란제의 영향력에 너무 의존해 레나르트 요한슨을 앞세운 유럽축구연맹(EUFA)의 움직임을 중심으로한 반아벨란제 세력을 태동시켰다는 사실
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반아벨란제 세력의 동향을 적절히 이용해 요한슨이 주창한 공동개최에 일찌감치 정부차원에서 힘을 실어 주는 등 치고 빠지는 작전을 잘 구사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사실상 일본이 한창 월드컵 유치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판에 도중에 뛰어든한국이 성공하리라고는 아벨란제를 비롯 누구도 쉽게 예측치 못했다. 한국이월드컵 유치에 나선 것은 2년 6개월전인 지난 93년 11월 이때 한국정부는 월드컵유치 정책을 결정했으며 이어 94년 11월 9일 월드컵유치공식의사를 표명한서한을 FIFA에 발송했다.
일본은 정부차원의 막대한 원조기금을 미끼로 하며 당시만 하더라도 축구계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절대자로 여겨진 아벨란제를 앞세워 유치전을 폈다.
그러나 한국의 집요한 추적으로 인해 50대 50의 어려운 상황으로까지몰리면서일본은 다 된 밥그릇의 절반을 후발주자에게 넘기는 수모를 당하게된 것이다.
〈취리히.李東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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