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홍규의 '필름세계' 역사와 영화사이(17)

인디언의 역사는 망각의 역사이다. 어떤 역사책에도 그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도 흥밋거리로영화가 그들을 야만의 악당으로 멋진 백인 기병대에 쫓겨 죽어가는 무리로나마 묘사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인디언은 미국 원주민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멸종상태에 있다. 이렇게 원주민이 멸종상태에 있는 곳은 미국과 호주 또는 뉴질랜드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지상의 파라다이스로 생각하는 것일까? 살육으로 씻은 땅이 천국인가?인도사람이라는 뜻으로 인디언이라고 부른 콜럼버스가 인도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무렵 원주민은 약 2백만명 정도였는데 1996년 지금도 그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이 '독립'할 무렵 4백여만명이었던 백인은 지금 2억명을 넘고있다. 독립시까지만 하더라도 백인과 원주민은 대규모의 살육전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소위 '서부개척'이 시작되면서 엄청난 살육을 당하여 죽어갔다.19세기초 잭슨대통령은 1명의 백인 희생자당 10명의 원주민을 죽일 것을 명령했고 원주민토지에투기했다. 그러나 잭슨은 지금도 용감한 개척자이자 군인, 특히 민주주의자로 기록된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카스터장군이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죽자 1890년 운디드니에서 인디언 항쟁에 종지부를 찍는 전투가 벌어졌다. 죽어가는 원주민은 말했다. "백인은 해마다 우리를 기만하여 땅을 강탈하곤 했다.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된 이유를 알 것이다. 백인들은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인디언들은 속일 줄 모른다. 백인은 질이 나쁜 교사이며 그릇된 책을 가져다 주고 그릇된 행동을하고 불쌍한 인디언을 속이려고 면전에서 웃음을 흘린다. 믿음을 사려고 악수를 하고 술에 취하게 하여 기만하고 부녀자들을 농락한다"

그래도 지금 원주민이 2백만명이나마 남아있는 것은 1934년 이후의 인디언 보호정책에 의해 대폭늘어난 결과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원주민의 순수한 혈통을 갖는 사람들은 50만명에 지나지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득, 건강, 교육 등의 모든 측면에서 그들의 삶의 수준이 최하위라는점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알코올 중독자이며 실업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은 인종문제에서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미국원주민들은 백인의 자연정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지와 함께 조화롭게 융화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름도 그랬다. 원주민이 백인에게 붙여준 이름을 딴 영화 '늑대와 춤을'은 명백히 백인우월주의에 서있는 미국 할리우드식 영웅주의의 전통적인 서부영화는 아니다. 인디언과 '늑대와 춤을'이라는 백인의 우정을 주제로 한 영화는 그 마지막 장면, 곧 전자가 후자에게 "너하고 나, 서로 이해했다"는 말로 그 내용이 집약된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인디언을 무지한 민족이라고 묘사한다. 영화는 마치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시대와 같이 허구적인 설정을 하고있다. 예컨대 영화에서 인디언들은 1년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나 인디언의 의상은 매우 다양했다. 그밖에도 이 영화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지적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로맨틱하고 인간적인 작품', '인간의 신념을 훌륭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는등의 평가를 받는 점이다. 적어도 그것은 위에서 설명한 역사적 반성에서 철저히 성찰된 작품이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1994년 우리나라에서도 흥행된 '포카혼타스'라는 만화영화가 실제로는추장 딸을 겁탈했던 백인을 인디언 딸과 사랑하는 관계로 뒤바꾸었던 것에 비하면 '늑대와 춤을'은 그래도 괜찮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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