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남산-남천의 교각

"石材 하나에도 애틋한 사연이…" 잦은 비를 뿌렸던 먹구름을 걷고 모처럼 맑은 햇살을 품은 남산. 남산기슭 논둑마다 파릇파릇 어린 모가 짖궂은 장난질이 한창인데 무심한 남천은 말없이 흘러간다.

경주박물관과 반월성이 만나는 도로에서 남쪽으로 몇 발자국을 가다보면 남천 옆에 우두커니 서있는 절하나. 공덕사로 불린다. 공덕사 앞 남천은 칠성다리 터. 천년전 수많은 서라벌사람들이 오고갔던 이터에는 공허함만이 남아 석재들이 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쑥기떡(수수떡) 장수를 하는 홀어머니와 아들 7형제. 홀어머니는 자식몰래 밤마다 남천 냇물을 건너 사내를 만나곤했다. 물살이 거세지는 장마때나 냇물이 빙판으로 변한 추운 겨울 남천을 건너는 어머니가 행여나 다칠세라 아들 7형제는 다리를 놓았다. 캄캄한 밤에 나갔다가 아침이슬을 맞고 돌아오는 어머니는 나중에야 아들들이 다리를 놓은 사실을 알고 크게 뉘우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머니에게는 효도를,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를 했던 다리라 하여 효불효교(孝不孝橋)라고 불렀다. 또 이다리는 칠자교(七子橋) 또는 쑥기떡 어미다리라고도 불리었다.다시 남천을 따라 가길 3백여m.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월정교터가 웅장한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84년 현지조사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교임이 확인됐다. 다리길이만도 63m에다 폭 9m , 다리기둥과 기둥사이가 13m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크레인같은중장비가 없던 1천2백여년전 사람의 힘만으로 이 다리가 지어졌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다. 많은 토목공학 전문가들도 당시의 교량축조 기술에 감탄을 금치못하고있다.월정교는 신라 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 고려 25대 충렬왕때 중수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언제 붕괴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지금은 당시의 규모를 말해주는 석재의 잔해들이 남천변에 남아있을 뿐이다.

민중 포교로 불교사의 위업을 남긴 원효. 원효는 월정교다리에서 "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허락하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桐斧 我硏支天柱:수허몰동부 아연지천주)"라 노래를 부르며 다리아래로 뛰어내렸다. 원효를 짝사랑해왔던 요석공주는 이때를 놓칠세라물에 빠져 새앙쥐꼴이 된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하루밤의 꿈같은 사랑. 요석공주는 그 후신라 10현(十賢)의 한사람인 설총을 낳았다.

귀하신 신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침범할 수 없는 불가의 계율까지 무너뜨리며 스님을 사랑했던요석공주의 구구절절한 사랑. 성불(成佛)을 눈앞에 둔 수도승 원효가 보시(布施)의 마음으로 내던졌던 순결. 이제 월정교터에서 슬픔의 재가 되어 남천을 따라 떠돌고있다.

월정교 옆 나란히 지었다는 일정교. 터럭같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현재 월정교 석재들을 가지런히 모아놓은 자리부근이 일정교터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주고있다.

혹자들은 칠성교터를 일정교터라 주장하고있지만 기록을 더듬어보면 월정교와 일정교는 같은 자리에 나란히 위치했다고 전해지고있다.

일정교는 해를 상징하는 만큼 대궐밖 출입을 위해 임금이 사용하던 다리로 추정된다. 또 월정교는 남산과 경주향교, 계림등으로 통하는 일반백성들이 이용하던 다리였을 것이라는 것이 사학계의 주장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라벌인들에게 충실한 남산의 안내자 역할을 했던 남천의 교각들. 그 어느다리도 거친 역사의 풍랑을 이겨내지 못하고 낱개의 석재로 흩어진채 남천 바닥에 드러누워 얕은호흡을 할딱거리고있다. 비록 부서진 몸뚱이지만 남천의 교각석재들은 그래도 질긴 생명력을 복원의 그날까지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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