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920년대 이미 '아나바다 운동'

대구여성을 새로운 시대, 개화된 사회속으로 끌어들이는데 놀라운 능력을 나타낸 대구YWCA의 75년 역사는 일제시대 폐쇄조치를 당한 1938년을 기점으로 전반기·하반기 두편으로 갈라진다.

1923년 창립된 이래 1938년(1940년 폐쇄설도 있음)에 폐쇄될 때까지 15년간은 기독여성들을중심으로 신앙과 여성을 위한 일에 평생을 헌신하려는 개척여성들에 의해 주도돼 나갔다.초대 회장 임성례(4대회장도 역임), 제2대 추애경, 제3대 이혜경회장은 그들의 정신과 능력을 지역발전과 여성개화를 위한 보이지않는 봉사에 투신했다.

대구YWCA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함께 세가지 과제를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첫째는 기도와 성경연구, 둘째는 금주회를 조직하고, 금주계몽을 하는 일, 셋째는 공창(公娼)제도를 폐지시키는 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독립을 갈망하는 Y회원들은 민족경제를 육성하려는 물산장려 운동에 특히 주력하였다. 일본경제의 침식으로 기울어져가는 한국경제의 생산성을 돕기 위해 소위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범국민적 운동에 Y회원들이 적극 동참하고 나선 것이다.

외래품의 고급 주단을 배격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명이나 베옷을 입자는 운동을 펼침과동시에 구습(舊習)과 폐풍을 타파하여 생활을 개량하는 일과 활동에 편리하고 간편한 의상과 우의보급운동도 펼쳤다.

20~30년대 대구Y가 펼친 물산장려운동은 80년대 이후 '아나바다운동'(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으로 부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십여년전부터 대구YWCA가 펼친 '아나바다운동'은 IMF 구제금융으로 온 나라가 어려울때 국민경제의 중심을 잡아주는 든든한 구심점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20년대부터 공창 폐지를 공개적으로 거론했던 대구YWCA는 제2의 돛을 올린 광복후에도그 맥을 이어받아 '여성들의 성상품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불씨 역할을 해냈다.회원들의 의식개발과 상호친목을 도모한 대구YWCA의 각종 모임에서는 탁월한 사회 지도층에 의해 성경연구는 물론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국사 경제 농업등 다양하고 광범위한 전문 강좌가 열렸다. 이런 강의는 어느 것이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의 고취가 근간을 이루고있어서 참가자들의 마음에 큰 자극을 주었다.

Y총회와 교양강좌에 참석했던 지역여성들은 훈련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생이 개인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테두리를 살리고 이어 나갈 필요성도 있음을 깨쳤다"고털어놓으며 우리나라를 되살리는데 서로 뭉치고 결속하는 일이 시급함을 자각했다.한편 해방후 대구YWCA는 제5대 이영현회장(신명여고 재단이사장 역임), 제9대 최귀희, 제10대 한순애 등 역대 회장단에 의해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며 지역여성지도자 배출과 여성운동의 구심점으로 활약해왔는데 추후 상술한다.

대구YWCA와 함께 20~30년대 큰 활약상을 보인 학생 Y는 신명여고. 1923년 9월2일에 조직된 신명Y는 해마다 서울에 대표를 보내어 중앙의 기풍을 곧 배워서 활동, 호흡을 항상 새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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