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칼럼-김찬석(논설위원)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에 약하고 감성적인 사람들도 없을듯 하다.

데모학생은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둘러도 아무말 없다가도 경찰이 좀 과잉진압한다싶으면 당장 『즈그는 자석 안키우나…』하고 나무란다.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민주주의하며 살아가려면 법을 지키고 인간끼리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 최소한의 도덕성과 합리성은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퇴출당해 마땅한 부패 공직자일지언정 술 잘사고 '기마에' 좋으면 무슨 짓을 했는가는 불문에 붙이고 되레 '화끈하다'고 칭찬이 자자한게 우리네 심성이다. 법을 지키고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는 깐깐한 양심보다 선후배 따져 거창하게 한잔 살줄아는 '의리'에 후한점수를 주어온 것이 우리의 정(情)이다.

지난번 5개 은행 퇴출 당시 은행원들이 금고문을 잠그고 달아나버린 사건에서도 공인(公人)으로서의 도리보다 처자식을 굶길수 없다는 가장(家長)으로서의 의리에 더욱 집착하는 편린을 엿볼수 있을것만 같다.

일본의 어느 퇴출증권사 대표는 눈물을 흘리며 국민에게 속죄했던 그 시점에 우리네는 퇴직금 챙기고 불법 투쟁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매사 공과 사의 구분이 안되고법을 지키는 대의명분보다 인간 정리에 휩쓸리기 일쑤니 제헌50년을 맞고도 우리의 헌정질서는 원점을 맴돌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물론 실직(失職)의 고통은 크다. 그렇지만 1조3천억원이 넘는 주식이 휴지화된 상황에서 주주에 대한 책임의식은 어느 누구 거론도 않은채 제몫 챙기기에 그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도 직장 잃은 근로자들의 절규는 그럴만하다고 납득이 안가는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위기에 제헌50주년 기념행사조차 치르지 못할만큼 식물화한 국회에 대해서는 권력이 있을수록 법을 안지키고, 영화는 누리되 책임을 지지않는 그 뻔뻔스러움에 분노할 기력조차 잃게된다.

재계와 법조계 비리가 잇따라 터지고 교육계와 심지어 군 장성에 이르기까지 어느한곳 깨끗한 구석이 없으니 이 나라 구석구석이 탈법과 불법의 부패한 먹이사슬로 얽히고 설켜 있는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옛말에 '관리가 돈을 밝히지 않고 군인이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文人不愛錢 武人不惜命)'나라는 저절로 흥한다 했다.

이말대로라면 요즘 거의 매일이다시피 불거지는 지도계층의 무너진 모습에서 바로 망국(亡國)의 불길한 느낌마저 연상하게 된다해도 지나치지 않을듯 하다.

우리사회에는 헌정50년동안 법을 지키고 공중질서를 중시하는 민주시민이 되기보다 학연·지연·혈연의 정에 얽매여 앞에서 이끌어 주고 뒤에서 받쳐주는 편향된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처럼 국법(國法)이 중심 잣대가 되는 것이 아닌 정실 위주의 국정운영은 저효율성과 부패를 불러왔고 그 결과 지금 우리는 3공화국 이래 유례가 없는 혹독한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YS가 정치를 잘못해서 환란이 닥쳤다기보다 PK 따지고 TK따지는 정실 정치의 월권과 탈법속에 IMF시대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고 볼수 있을것만 같다.

그런만큼 우리가 지금의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가 법을 뛰어넘어 유린하는것을 막아 내야한다. 국정운영이 정치력이 아니라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원칙이 지켜져야정치가 살고 나라가 산다.

과거 한때 지도자의 현명한 초법적(超法的)지도력이 이 나라를 크게 발전시킨적도 있었음을기억한다.

그러나 그때에 비해 이제 모든것이 엄청나게 성장한만큼 몇사람의 지혜로 나라를 이끌기에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봐야한다. 이땅에 헌정이 시작된지 어언 50년.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가 자리잡을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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