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현대사는 빨치산의 비극적인 운명과 맥을 같이한다.
백두의 맥이 반도의 등줄기인 태백을 타고 내려와 소백산맥이 끝나는 반도의 남단에서 다시솟구친 지리산(智異山). 그 역사의 한켠에 빨치산과 그에 맞선 토벌대의 비극적인 역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낮엔 토벌대, 밤엔 빨치산'. 이데올로기 투쟁과 좌절, 끝내 스러져간 유격대와 희생된 양민의 넋들이 역사의 저편에서 아득하기만 하다. 빨치산의 숱한 핏자국은 이젠 시멘트길과 등산객의 발길속에 파묻혔지만, 아직도 지나간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마지막 증언자들은 남아 있다.
48년 제주 4·3항쟁과 제주 토벌작전을 거부한 여순반란, 그리고 반란군 1천여명이 광양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투쟁을 전개하면서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는 시작된다.6·25직전 남로당 연락부장 이현상은 지리산 산악지대에 뿔뿔이 흩어진 반란군의 잔여세력과 반란에 동조해 도피중인 민간인을 규합, 세칭 '지리산 유격대'를 조직한다. 이 유격대는49년 7월부터 '제2병단'이라 명명된다. 바로 '남부군'이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지리산 빨치산이 최대 희생자를 냈고,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현상이 총탄세례를 맞은 대성리 빗점골은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계곡이다. 단천, 의신, 삼정, 빗점, 대성마을이모인 대성리는 6·25 전후 1백50가구의 꽤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일부 가옥이 불타 없어졌고, 주민 상당수가 이주해 빈집이 태반. 이곳 노인들은 당시 빨치산과 토벌대에 대한 기억이아직도 생생하다.
"밤이 되면 보급투쟁을 나온 빨치산들이 집집마다 찾아들었죠. 먹을것을 요구하거나 옷이나양식을 주민들이 직접 산속으로 옮기도록 했어요"
의신마을에서 일제식민지와 해방정국, 6·25전쟁을 모두 겪은 조성오씨(67). 의신마을이 빗점골과 대성골로 갈라지는 요충지여서 빨치산과 토벌대간 격전이 빈번했다는 그는 "당시 총으로 위협하는 빨치산이 무섭기도 했지만 날이 밝으면 마을에 상주하며 빨치산 부역자를 찾는데 혈안이 된 토벌대의 눈초리가 더욱 겁났다"고 회고한다.
52년 1월 국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눈덮힌 대성골은 신흥, 빗점골, 거림골에서 모여든 빨치산 1천여명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의신마을을 비껴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원대성의 주민은 단 한가구. 민박과 세석평전 길잡이 노릇을 하며 살고 있다. 십리쯤 골짜기를 내려오면원대성에서 이주한 임성우씨(47) 등 두가구가 밭을 일구며 사는 대성마을이 나온다. 빨치산의 비극적 말로를 아는듯 모르는듯 대성골은 세 가구만을 보듬은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의신마을을 곧장 지나 염소와 닭들이 뛰노는 삼정마을에 도착하면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계곡, 빗점골이 눈에 띈다. 넓은 초지를 염소방목장으로 활용하며 6가구가 살고 있는 삼정마을은 빗점골 빨치산의 역사를 간직한 끝마을이다. 빗점골 가장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빗점마을이 토벌작전에 따라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삼정마을에서 1Km정도 산속으로 들어간 빗점마을에는 이제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뿐 등산객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다. 빗점마을에서 20여분 걷다보면 절터골, 산태골, 인골의 세 골짜기가 합쳐지는 빗점골 합수내흐른바위가 나온다. 자그만 바위들이 무수히 흘러내려 형성된 이 '너덜대지'는 45년전 남과북 양쪽에서 고립된 남한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피를 뿌린 곳이다. 삼정마을 박준계씨(52)는"53년 가을 이현상이 토벌대 매복조 30여명에 의해 이곳에서 총탄세례를 맞고 숨진 것으로알고 있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안내원. '마지막 빨치산' '여공비' '남장 빨치산'으로 불리우는정순덕이 태어난 곳이자, 지난 63년 토벌대에 의해 붙잡힌 곳이기도 하다. 내원사를 지나 안내원에 오르는 좁은 산길은 지금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빨치산과 토벌대가 숨죽이며오르내렸던 또 하나의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는 안내원은 여순반란사건 직후 토벌대가 빨치산 소탕작전을 벌이며당시 민가 10여가구를 모두 불태운 사연이 남아있다.
안내원 주민 김재용씨(77)는 "빨치산에게 콩 2되를 내준뒤 이들을 잡지 못했다고 토벌대에게 몰매를 맞았다"며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를 잘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6·25직후 경남 산청군 오부면 주민 수백명이 빨치산과 연루된 것으로 오해받아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고 증언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옆집에 살았던 김씨는 "정순덕은 6·25가 낳은 기구한 운명의 희생자"라고 했다.
정순덕은 16세 되던 해인 50년에 인근 시천면 사리로 시집을 간다. 남편은 결혼직후 6·25가 나자 공산군에게 이른바 '부역'을 하게 되고, 이후 보복이 두려워 국군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사살된다. 지아비를 잃은 정순덕은 '한'을 품고 빨치산이 돼 13년간 지리산을누비게 된다. 결국 63년 고향인 안내원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내려왔다 매복한 토벌대에 생포된다. 현재 그녀가 태어난 집은 불타 없어져 터만 남아있고, 그녀가 어릴적 생활하던 집은이웃집 축사로, 생포된 집은 조종상씨(84)의 양옥집으로 바뀌었다.
빨치산과 토벌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양민들. 지리산은 이들의 한과 비운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에 간직한채 가없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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