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파노라마 20세기 문화(39)-극사실주의

솔거의 소나무 벽화 이야기를 알 것이다. 진짜 나무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새들이 날아들다 벽에 부딪혀 죽었다는.

사진기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회화의 가장 큰 목표는 '대상과 꼭 같이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출현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거장이 아니더라도 셔터 하나만 누르면 그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또 하나의 실제를 얻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결코 사진기를 따라갈 수 없는, 인간의 어설픈 사실적 묘사는 차라리 유치한 시도로 인식될 정도였다. 이에 따라 미술 문외한은 도통 알 수 없을 정도의 난해한 정신세계와 파괴된 형태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가 등장, 1940~50년대 세계 미술계를 휩쓸었다.

추상표현주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이번에는 어렵기만 한 추상미술 흐름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또 하나의 사조가 나타났다. 60년대 후반 뉴욕과 미국 서부 해안지역에서 태동, 1970년 미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기획전 '스물두 명의 리얼리스트들'을 통해 알려진 극사실주의 운동.

이후 70년대를 풍미했던 극사실주의계열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사진일까, 그림일까'하는 의구심에 한 번 더 뒤돌아보게 만드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검볼(gumball)' '오토바이' '가족·이웃·친구의 얼굴' '자동차' '네온사인' '고등어' 등 일상의 사물들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확대한 화면은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인간과 사물의 추악함을 고스란히 묘사하므로 때때로 충격적이며 잔혹한 인상마저 줬다.

평면에 입체감을 더한 조각 작품은 더 놀라운 사실감을 갖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을 소재로 한 미국 조각가 두안 한슨(1925~96)의 전시회에서는 흔히 작품을 관객으로 착각해 말을 걸거나, 거꾸로 관객을 작품으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극사실주의는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팝 아트와 일맥상통한다. 차이점이라면 팝아트에서는 작가의 생각이나 의도가 작품속에 반영된 반면 극사실주의 작품에는 작가의 감정이나 의지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눈가의 잔주름과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무표정한 인물부터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오토바이까지 사물은 사물일 뿐이며 작가의 생각이나 철학 등은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70년대를 꿰뚫었던 하나의 미술 경향이기에 '~운동' '~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긴 하지만 작가들의 개성으로 인해 이러한 작품경향을 가리키는 용어는 지금까지도 통일되지 않은 상태. 극사실주의인 하이퍼 리얼리즘부터 슈퍼 리얼리즘·포토 리얼리즘·래디컬 리얼리즘·마이뉴트 리얼리즘·스튜디오 리얼리즘·샤프 포커스 리얼리즘까지 다양한 용어가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극사실주의 작가는 크게 작품제작에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사용한 척 클로즈, 하워드 캐노비츠, 맬컴 몰리와 사진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연 풍경이나 모델만을 대상으로 하는 필립 펄스타인, 시드니 틸림 등 두 계열로 나눠진다.

속옷 차림의 여인상을 주로 그렸던 캐시어나 건물 정면을 즐겨 묘사했던 에스테스, 자동차를 주요 소재로 사용한 솔트, 돈 에디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충격적일 정도로 완벽한 실물을 재현해 내는 극사실주의계열의 주요 조각가로는 두안 한슨과 존 드 안드레아를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극사실주의란 단신 인간의 손재주가 사진기에 뒤지지 않음을 과시하기 위해 나타난 움직임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극사실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진이 '생생하다'고 했을 때 그것이 엄청난 모순이란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 우선돼야 한다. 이미 '죽어버린 순간'이 된 사진이 생생하다고 말하는 것은 박제가 생생하다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사진기가 포착한 영상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실물로부터 떨어져 자립한 일종의 허구인 셈이다.

사진의 객관성에 대한 맹신. 극사실주의는 사진의 객관성과 회화의 주관성에 대한 감상자의 '믿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것은 극사실주의 작품이 감상자들에게 던져주는 문제의 출발점이다.

극사실주의 작품 앞에서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한 번쯤 놀란다. 이유는 비슷하다. 사진이 아닌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 놀라움은 사진으로 찍히면 무엇이든 믿어 버리는 허구가 깨지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극사실주의 작가들은 그러한 영상세계의 허구를 보여준다.

극사실주의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사물을 진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묘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허구로 보여주는 것'에 있다.

극사실주의 작품의 놀랄만한 '생생함' 뒤에는 항상 허무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작품 자체에서 비롯된 허무가 아닌, 이미지의 포로가 돼버린 인간의 허무함일 지도 모른다.

〈金嘉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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