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과 공간-25)시리즈를 마치며

묘하게도 집은 인간을 닮는다.안온한 느낌을 주는 집은 그 주인 또한 안온하다. 집이 어째 괴팍스럽다 싶으면 그 주인 또한 그렇다.

경북 봉화에서 손수 집을 지었다는 어떤이를 찾아갔다. 책까지 출간한 터라 그의 집에 대한 철학을 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무려 3시간 30분만에 어렵게 골짜기에 박혀 있는 그 집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양반'은 "언 놈이 와도 취재는 안돼!"라면서 문전박대했다.

멀리 나와 그 집을 다시 봤다. 외딴 곳에서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 모양은 집인데,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동굴에서 살던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움막을 지었을까. 동굴이 비좁았을까, 아니면 시쳇말로 '왕따'를 당했던 것일까.

나뭇가지를 모아 얼기설기 엮었을 움막이 동굴보다 결코 안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 바람을 막지도 못했을 것이며, 강한 동물의 침입에도 그대로 노출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움막을 지은 것은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때문이 아닐까. 동물의 습성인 무리를 벗어난다는 것, 곧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다. 집을 지으면서 인간은 그제야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사고(思考)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동굴에서 움막으로, 그리고 이제 20세기 말의 인류의 삶은 고도의 첨단기능을 갖춘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옮겨 앉았다.

'건축문화의 해'를 기념해 마련된 이 시리즈는 '선과 공간'에서는 1천여년전 신라인의 삶터인 '왕경'도 다뤄보고 싶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다루지를 못했다. 왕경은 요즘으로 치면 블럭개념인 4방 150m씩 방(坊)으로 나누어 그 사이에 도로를 내고 하수도를 이어나간 정밀한 계획도시였다.

최근 몇년 사이에야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이 홀대하듯, 이 시리즈 조차 결과적으로 홀대하고 만 듯해 가슴이 아린다. 더우기 그 터에 곧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보니 '역사'를 깔아 뭉개버린 듯 죄의식마저 든다.

축소 복원된 황룡사 역시 건너 뛴 것이 가슴 아프다.

불국사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대표적인 건축 문화재에 대해 이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는 자괴심이 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긴 했으나, 그것이 우리의 자발적인 신청이 아니라 외국인의 우연한 방문에 힘입었다는 얘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당초 우리는 석굴암만 신청했으나 조사를 나왔던 스리랑카 전문가가 경주로 되돌아 오다 불국사를 보곤 "왜 이런 문화재를 신청 않느냐"고 해 거꾸로 일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선조들의 미적 감각과 생활의 지혜가 오롯이 모인 고건축물들이 빈집으로 변해가는 것도 가슴을 무겁게 한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서깊은 종가집들이 후손들의 도시 이주로 비어가고 있었다. 어느 종손은 "종손이라는 자리만으로도 힘든데 어떻게 농촌으로 되돌아 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앞으로 더욱 종택지키기가 힘들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고건축물들과 현대건축물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옛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은 전혀 별개의 공간이다. 시간적·공간적 유대감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현대 건축물들도 대부분 미적 감각 없는 시멘트 덩어리일뿐이다. 특히 아파트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도로 석기시대 동굴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것이 그저 사람만 차곡차곡 채워넣는 '인간탑'이다. 아파트건축업체의 한 간부는 "아파트를 세우지 않고는 주택난을 어떻게 해결하겠느냐"고 항변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캐나다 건축가 모셰 새프디가 지난 67년 세계박람회 건축때 지은 캐나다 몬트리올의 주거건축군(群) '아비타 67'. 아파트처럼 다가구가 살수 있는 공간이면서 각 집마다 단독주택의 분위기를 주는 특이한 건축물이다.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웃집과의 연결도 자연스럽게 해놓았다.

'밉고 무뚝뚝하고 멍청하게' 보이는 우리 아파트들과는 달리 특히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 변화감 넘치는 구성에서부터 형태미, 친근감, 균형감, 통일감, 조화미에 인간미까지, 한마디로 건축이 '디자인'의 개념으로까지 확대된 느낌이다. 그 공간에 몸을 뉘일 사람들은 숨쉬기 마저 아주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는 집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것으로 쉽게 정의해 볼 수 있는 건축. 인간이 꿈꿔온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21세기 한국 건축,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건축가들의 머리만 무거운 게 아니다.〈끝〉

〈金重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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