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주영 세상읽기-'금일봉'의 수재의연금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산에 나무를 많이 심으면 하천의 급격한 범람을 막고, 따라서 매년 찾아오는 상습적인 홍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을 따라 우리는 고사리 손일 적부터 머리가 쇠도록까지 여가 마다 나무 심는 일에 동원되곤 했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애쓴 보람이 헛되지 않아 전국 어디를 가든 산천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계곡의 물은 눈뿌리가 시리도록 푸르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푸른 시냇물을 찾아 내려면 몇백리를 무릅쓰고 시골길을 탐험해야 하고, 폭우가 내렸다 하면 예외 없이 수많은 시민들이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소중한 재산들과 엄청난 가축들이 몰사 당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산에 나무를 심으면 수해를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선생님은, 불과 십수년 뒤에 우리들에게 다가올 무분별한 개발과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예측하지 못했던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경기 북부의 도시 한가운데를 도도하게 관통하고 있는 흙탕물의 범람을 바라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에 터득하였던 금쪽 같이 소중한 배움이 헛되거나 겉돌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고사리손들과, 평생 나무를 심어 왔던 노인들은, 텔레비전 매체가 차려 놓은 수재의연금함에 알뜰하게 모아 두었던 가용돈을 쾌척하고 있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기성세대에게 참여의식을 촉발시켜 주고, 고난을 겪고 있는 이웃과의 괴리와 갈등을 순식간에 마모시키고 일체감을 형성시키는 것에, 매년 어김 없이 찾아 오는 수해가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디 그들 뿐인가. 정부의 고위직에 있는 분들과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도, 흡사 이런 때를 기다렸다는듯이 의연금 모금에 예외 없이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동참이 석연치 못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면, 너무 예민하거나 사시적인 시선일까. 반드시 '금일봉'으로 적바름되고 있는 그들의 이름이 거의 비슷한 날짜에 몇가지 신문에 한결 같이 올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째서 몇가지 신문에 두루 금일봉을 전달해야 하며, 그들이 낸 의연금은 어째서 반드시 금일봉으로 적바름돼야 하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와선 당연시 되고 있는 금일봉이란 익명성은 필경 권위주의가 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하였던 지난날의 잘못된 관행이다. 또한 이런 관행에 신문의 상업주의가 스스럼 없이 동조하고 있다는 것에도 실망이 크다. 유명한 정치인들의 이름이 자신들의 신문에 게재되지 않으면 신문의 성가가 훼손될 것처럼, 서둘러 그들의 이름을 싣는다. 이런 현상들은 정치인들과 관료 사회에 부패와 비리가 상존할 수 있다는 명분마저 제공한다.

시골길을 여행하다 보면, 정치인에게는 주례를 부탁하지 말고, 축의금도 받지 말라는 계도성 플래카드가 나붙은 것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런 플래카드가 나붙게 됐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이 먼저 앞장서서 버려야 할 구태를 왜 끌어 안고 있어야 하는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금액의 고하를 막론하고, 당연히 의연금의 금액을 밝혀야 하고, 그 돈이 자신의 것인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원 받은 것인지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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