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성역이 너무 많다

성역(聖域)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예를들면 수사당국이 판도라 상자와 같은 기업과 정치권의 검은 거래를 파헤치지 못할때 성역없는 수사를 요구한다든가 책임과 의무는 팽개치고 자유만 외치는 언론이 있다면 그곳은 과연 성역인가 하고 물을 수 있는것 등이다. 이럴때 성역이라는 말에는 묘하게도 뒤심이 있어 보인다. 속말로 빽(?)이 든든해 보인다는 뜻이다. 성역이란 원래 종교에서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와 구별되는 신성한 장소다. 보호력과 신성함 때문에 범죄자들에게는 더없는 피신처다. 우리에게도 이미 삼한시대부터 솟대 혹은 소도(蘇塗)라는 성역이 있었다. 물론 죄인이 도망쳐서 이곳에 숨더라도 잡아 갈 수 없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때까지 아주 제한적이나마 이러한 성역이 남아 있었다. 대사관이 외교적 피신처로 통하는 관례라든가 국회에서 면책특권이 허용되는것도 그 원천은 성역이다. 이런 것은 모든 이들이 긍정하는 성역이지만 문제는 돈 많고 힘있는 사람들 또는 집단들의 성역아닌 성역들이 사회 곳곳에 독버섯 처럼 버티고 있는 점이다. 그곳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범죄성 죄질들 중에는 심증뿐 아니라 물증까지 있지만 막대한 돈과 힘 때문에 그러한 죄상들은 돈과 힘이 있는 한 묻혀 버리기 일쑤다. 이런 성역이 우리 주위엔 지금 너무 많다. 탈세혐의로 보광그룹 사주이자 중앙일보사장 홍석현씨가 구속됐다. 중앙일보는 사과의 말을 지상을 통해 냈다. 그리고는 정부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 아래 언론을 탄압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위야 어떻든 언론탄압의 예로 청와대 대변인의 행동과 언동이 자세히 공개되고 있어 세인의 주목거리로는 충분하다. 문제는 언론이라고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언론과 누구나 성역으로 치는 청와대의 한판을 바라보아야 하는 국민들이다. 이만한 한판은 쉽게 이뤄지지도 않고 흔한 일도 아니어서 더욱 관심거리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언론이나 청와대나 다같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대신 자유를 누릴 만큼 책임과 의무 또한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러다간 성역 길들이기라는 말까지 유행하지 않을까 싶다.

김채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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