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재님.
기필(起筆)을 어떻게 들까하고 잠시 생각에 젖어봤습니다만 백망당중(百忙當中)의 공인이라 본얘기로 바로 접어들지요.
일선 데스크때와 달리 논설실의 말석(末席)을 더럽히다 보니 때로 총재께서 그려내는 궤적의 부분 부분이 더 잘 뵈는 것 같아 지금 지역 시민의 입장에 섰습니다.어느 신문에 보니 이 지역은 이총재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썼습디다만 지금 그 '고향'사람들의 심기가 그다지 편안치 않은 것같군요.
특히 풍광 수려하기로 소문난 동해안일대 주민들에겐 생선회 잘 먹는 사람이 해양수산부장관이 됐는데도 어획량은 자꾸 줄어들고 이젠 원전(原電)의 불안한 그림자까지 씌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묵혀져왔던 원전의 핵심이슈들은 모두 여당의원들의 손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으니 도대체 이총재 야당의 소임은 어떤것인지 난해하군요.
한국전력이 캔두형 원자로의 결함가능성을 사전에 인지했다는 의혹의 제기도, 월성1호기의 냉각배관 760개중 62개가 부식이 진행돼 냉각수의 유출우려도 모두 국민회의의원들이 한건씩 한겁니다.
더욱이 감포앞바다에서 울진에 이르는 원전주민들은 방재훈련에도 제외돼 있으며 주민 100명당 방호복은 고작 3벌만 지급돼 있어 사고때엔 방사선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사실도 여당의원들이 조사한 겁니다. 이총재께서 국정감사기간에도 비주류 껴안기에 여념이 없었던 탓으로 알지요.
지난 시절의 야당은 국감시작전에 당사의 넓은 홀을 '국감 상황실'로 만들고 제보용 전담전화도 가설해 상주당원들이 쉴새없이 움직여 대목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사실 국정감사는 야당의 대목장 이상이지요. 상임위별로 현안을 꼼꼼히 챙긴후 의원들의 성적표도 내밀히 만들었습니다.
이총재님.
대목장날에 실수하는 각설이는 더이상 각설이가 아닙니다. 백보를 양보해 실수라도 했다면 또 해량(海諒)하는 과정이라도 있지만 아예 전을 펴지도 않은 건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향' 사람들의 얘기를 더 해볼까요.
대도시 대구에 공업용지가 없어 자치단체가 그처럼 속을 끓여도, 광역단체별 소득이 시·도 할 것 없이 몇년을 내리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해도 중앙당 차원에서 '고향'을 위해 힘줄 튀어나오도록 흥분한 적이 한번 있었습니까.
위천이야기는 이제 입이 써서 하기도 싫습니다.
중앙일보 사건과 관련해선 중앙당 차원의 논평·성명이 마치 초등학생 받아쓰기 한 공책처럼 들쭉날쭉하더니 이젠 전지 떨어진 라디오같이 아예 말이 없습니다. 한때 국감을 팽개치고 나서니 주위에서 잘했다고 합디까? 야당정치의 80%는 언론정치라고 앞서의 9단들은 설파했습니다. 첫번째 성명을 내기 전에 대변인실에서 당을 출입하는 언론 각 사의 야당 반장급 기자들과 호프집에서, 마른멸치라도 안주 삼으며 '귀사 내부에선 이번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을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문제의 본질파악에도 일조가 됐을 뿐 아니라 최소한 거대 야당으로서의 일관성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총재님.
과거 한때, 야당출입기자들이 당사주변 식당에서 주문했던 식사가 조금 늦게 나오기라도 하면 '식당도 야당탄압하느냐'고 짐짓 언성을 높였던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야당출입기자들의 이른바 '야당마인드'라는 거죠. 이는 곧 기자들과 총재, 특히 대변인의 현안인식이 심정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꼭 내놓아야 될 성명, 안해도 될 논평정도는 확연히 가려내겠지요. 전직대통령 자제의 사면을 놓고 대한민국에서 입가진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하는 판에 한나라당 논평이 실로 옹색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지요.
그 배경이야 짐작하지만 아무튼 정치판에서 소금이 못되면 간장이라도 돼야 야당간판은 남을 겁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국정감사도 마무리 수순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총재로서 이젠 당내 정치보다는 국민 정치쪽으로 관심을 옮겨 보는건 어떻습니까.
적어도 국민고통 있는 곳에 야당있다는 등식하나만은 재임시에 만들어 보시죠.
항상 건투바랍니다.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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