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전 9시에 대구시 남구 이천동사무소 3층에 자리한 '그늘 좋은 노인공동작업장'(053-476-1991)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타난다.
곧이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곱은 손으로 달력 끼우기에 분주하다. 낱장으로 찍혀나온 2000년 달력과 스프링, 표지를 한데 묶어 낸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누구는 달력 낱장을 집어주고, 다른 사람은 용수철을 끼우고, 비닐을 감으며 작업 효과를 높인다.
이날 공동작업에 참가한 사람은 노인은 모두 6사람. 박말분(74·남구 봉덕동)할머니, 이수길(72·남구 대명동)할아버지, 윤상오(62·수성구 수성동) 할아버지, 금태수, 권갑철 할아버지 등이다.
"이것이라도 하면 마음이 더 편해. 일이 있어야 인생이지…"
그늘 좋은 노인공동작업장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일이 있어야 사는 것 같다고 전한다. 이분들의 수입은 한달 평균 10만원선. 자녀들과 함께 동거하는 박말분 할머니는 이 돈을 벌어서 손주들 용돈도 주고, 담배도 사피운다.
공무원 출신 권갑철 할아버지는 퇴직 목돈을 증권으로 몽땅 날렸다.
"마음은 청춘인데 퇴직후 반기는 곳도, 마땅히 일할 곳도 없어서 증권에 투자했는데 그만 휴지조각이 돼버렸어"
권할아버지는 장애인 의무고용처럼 노인 의무고용제를 도입, 이를 실천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준다면 노인취업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노아복지회 자원봉사자 장해숙씨는 "적잖은 노인들이 퇴직금을 증권사나 투자신탁에 맡기는 정도이다. 잘못될 경우 돈잃고 건강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들려준다.
10월말 현재 대구시내에서 운영되는 노인공동작업장은 모두 12개(전국 441개, 96년말 현재). 이곳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십만원 안팎의 돈을 번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 까치아파트 안에 있는 남산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은빛고을 노인공동작업장(053-254-4902)에도 십여명의 노인들이 작업을 한다. 평균 연령이 72세. 이곳의 최고령인 문옥순(85) 할머니도 가정형편이 워낙 쪼들려 계속 일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대구시내 25개 복지관이나 경로회에서 주선하는 일자리가 부업에 그칠 뿐, 본격적인 일자리 연결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그나마 노인부업거리를 찾는데도 노인공동작업장에 관여하는 사회복지사들은 발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다.
남산복지관 조영진대리는 30여개 업체를 일주일 동안 찾아다녀서 겨우 서너군데서 노인 일감을 얻는데 그쳤다고 일감 개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한국노인의 전화 대구지부(053-423-0434) 김지숙 간사는 "최근 노인 상담 가운데 일자리 상담이 부쩍 늘고 있으나 취업은 별로 되지 않는다"고 전한다. 오히려 "실직자에게 수위 자리를 빼앗겼다. 노인 직종은 손대지 말았으면 하는 하소연이 빗발친다"고 말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변재관 노인복지팀장은 건강을 전제로 능력과 자본이 있는 노인, 자본은 있는데 능력은 부족한 노인, 자본력과 능력이 중간 정도인 노인, 능력은 있는데 자본이 없는 노인, 능력도 자본도 부족한 노인으로 분류하여 창업이나 재취업을 지원해야한다고 말한다.
실제 보건사회연구원은 고령자 취업 혹은 창업이 단순히 노동력 보완의 의미를 넘어서 현역 근로세대들의 고령자 부양부담을 줄여준다는 차원으로 전환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 예견, 고령자 창업 업종 선정을 위한 정책 연구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변씨는 노인을 제2의 현역세대로 보아야한다는 시각으로 바뀌고 있으며, 일하는 노인층의 확대를 통해서 사회적 부양비용을 줄일 수 있고, 고령자 창업지원이 고령사회에 대비한 사회충격을 완화시켜줄 수 있어서 노인 취업, 창업을 도와야한다고 주장한다.
"노인은 뒷전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야한다는 생각은 이제부터 고쳐나가야할 시점"이라는 박진필 총괄사업팀장은 노인의 능력과 자본력, 전문성에 따른 일자리를 개발하여 노후의 생산력을 우리 사회의 경쟁력으로 활용해야한다고 말한다. 실제 일본의 경우 고학력, 전문직에 종사하다가 퇴직한 노인 여럿이 힘을 합쳐서 만든 호텔이 '투숙객들에게 가장 편안함과 쾌적함을 선사한다'는 호평을 얻는 최고 인기 호텔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능력은행(보건복지부 산하 전국 노인회 지부 운영), 노인공동작업장, 고령자인재은행(노동부 주관, 전국에 25개로 조기정년퇴직자 중심 상담, 02-715-3212), 대구노인복지회관(053-766-0611), 산업인력공단 취업알선센터(053-585-1919) 등이 노인취업이나 창업을 돕고 있다.
"젊은 우리들도 일할 자리가 없는데 노인들이 왜 나서요"라는 젊은이들의 시각에 대해서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늙는 것 금방이야, 우리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젊은 사람들 문제야. 노인들 일자리를 빼앗지 말고,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개발할 수 없어…"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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