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딱한 우리 자화상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를 보고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의 얼굴에 시험점수가 그려져 있었다. 공부에 찌들어 일그러졌던 그간의 표정이 시험을 치고난 후부터는 다소 활기가 돌았던 터였다. 오늘의 저 얼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개인적인 특성과 조건들은 외면한 채 오로지 그가 획득한 점수에 들어맞는 대학의 지원서를 몇 장씩 들고 한꺼번에 달려가는 또 한 번의 북새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인생이 몽땅 걸린 싸움이 한바탕의 진검승부를 통하여 멋있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접수창구에서 벌어지는 순간의 눈치전쟁으로 결판나는 현실 앞에서 수험생의 어머니는 한 달 전 바로 그날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또 한번 눈치전쟁 예고

1999년 11월 17일 오전 8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황급히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는 싸늘한 교문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다. 이제 시작되는 인생의 승부에서 아들의 완승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온다. 간밤부터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못된 시어미처럼 미워져서 옷소매를 추스려보지만 어머니의 잔 등을 두드리는 것은 썰렁한 찬바람 뿐이다.

8시40분. '… 본 방송은 200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제1교시 언어영역의 듣기 방송입니다…'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눈을 감는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가상하며 교육방송의 수신상태를 점검한 결과 이상이 없었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문 밖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듣기평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늘을 날던 비행기도 날개를 접었고 건설현장의 망치소리도 휴식에 들어간 15분간이 왜 그리 길게만 느껴졌는지 모른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어머니의 기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어머니 기도는 계속되고…

오후 5시30분. 길고 길었던 하루의 역사를 끝내고 환호성을 지르며 내닫는 아이와 종일토록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던 어머니가 손을 잡는다. 수험생과 그 가족, 학교의 교육종사자, 문제출제에서부터 여러 과정의 문답지 관리를 맡았던 당사자들과 매스컴 등 전 국민 모두가 오랜 긴장으로부터 놓여나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시각이었다.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지만 어머니의 가슴 한 구석에는 여전히 공허의 찬바람이 남는다.

밀레니엄이 어쩌고 하면서 며칠후면 무슨 큰 일이라도 터질 것처럼 세상이 온통 소란스럽다. 구제금융의 터널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구조조정의 풍랑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절대빈곤층이 확산되고 있는가 하면 이익집단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필사적으로 벌이고 있는 지구촌의 모습은 이미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는 21세기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기에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게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힘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그날, 시험장 밖에서 교문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던 한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눈치싸움으로 인생의 승부를 결판내야하는 아이도 딱하고, 15분간의 듣기방송에 숨죽이고 긴장해야하는 어른의 꼴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새 천년에는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던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2000년 세모에는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 세상을 덮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함박눈을 맞은 어깨를 털며 뛰어와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이 나도 그런 세상에 안기고 싶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배경으로 펼쳐진 멋진 눈밭에 나가 뒹굴며 딱한 우리 자화상을 잊고 싶다.

조명래(수필가.경북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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