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각가 이광달씨의 한맺힌 50년

"60년 당시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은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혼을 달래고 '인간 존엄성'을 찾기위한 하나의 움직임이었습니다. 5·16으로 인해 유족회 활동이 중단된지 40년이 됐으나 이제라도 묻혔던 역사의 그늘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피학살자 유족회 자료를 본사에 전달한 조각가 이광달씨는 한국전쟁 직후 모친이 달성군 가창 골짜기로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고 부친은 모친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몸부림치다 군사정권 치하에서 장기형을 받은 뒤 눈을 감은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왔다. 이씨는 1970년대부터 지역에서 활동해온 미술계 원로로 팔공산 팔공탑, 앞산공원 송두환 독립의사 동상 등 조각품을 만들었다.

이씨는 1960년 당시 피학살자 유족회 대구지구 고 이원식 대표위원의 아들. 이씨의 부친은 서지학자이자 의사, 한의사, 수학, 에스페란토 어학자였으며 대구에 꼬레아영화사를 창립, 문화운동가·저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령으로 숨어 다니는 처지가 됐으며 당시 9세이던 이씨는 모친 고 정정희(1922년생)와 함께 부친을 찾는 군인과 경찰에게 시달려야 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8월쯤 집을 찾아온 군인과 경찰 2, 3명이 어머니와 이씨를 트럭에 태우고 가창골로 추정되는 곳으로 끌고 갔다. 칠흑같은 어둠 속, 두려움에 떨던 이씨가 어머니의 손을 꼭 부여잡았을 때 옆에 있던 군인이 이씨를 끌어내 다른 차량으로 옮겼다. 이씨의 모친 등 10여명을 태운 트럭은 골짜기 깊숙이 멀어져 갔고 그 이후 이씨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종전 후 예비검속이 풀려 귀가한 부친은 유별나게 의좋았던 모친의 죽음에 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1960년 대구에서 피학살자 유족회를 건설했다. 이씨는 "부친은 자신 때문에 희생된 모친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고통스러워 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잠시, 이씨의 부친은 5·16이 일어난 뒤 다시 검거돼 사형언도를 받았으며 무기로 감형돼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1970년 4월 출옥했다. 그러나 1973년 사회안전법으로 재투옥, 77년 다시 세상으로 나왔으나 교통사고로 인해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이씨는 "부친은 민족주의자로 모친을 포함, 피학살자들의 원혼이나마 달래주려다가 인고의 삶을 살았다"며 "모친이 돌아가신 곳으로 추정되는 가창골 쯤에 유족 성금을 모아서라도 피학살자 위령비를 세우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했다.

李宗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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