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국사 시간에 배운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유적을 들라면 십중팔구 장군총을 든다고 한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만한 크기인지, 누구의 무덤인지, 어떻게 축조됐는지는 몰라도 장군총은 대단한 유적으로 인식돼 있다.
현재 집안(集安)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 7천여기 중 가장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된 무덤이 장군총이다. 집안시내 국내성 터에서 동쪽으로 4㎞쯤 가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북한(만포)-중국(집안) 국제철로를 만난다. 이 철길을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나는 것이 광개토대왕비.
여기서 북쪽으로 600여m 올라가면 거대한 돌무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장군총이다. 밑변 32m, 높이 12m.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고구려 최대 유적으로 통한다. 하지만 이 무덤도 사실은 집안 고분군 가운데 중간 정도 크기라니 고구려 고분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태왕릉의 1/5, 천추묘의 1/8 수준이다.
장군총에 사용된 돌은 모두 화강암. 돌의 전체 무게는 1만9천t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5t트럭 약 3천800대 분량이다. 돌만 들어간 게 아니다. 흙과 자갈이 1만2천500t 투입됐다. 5t트럭 2천500대 분량. 집안박물관측은 연인원 7만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됐을것으로 추정한다.
돌과 흙으로만 쌓은 이 장군총이 어떻게 1천5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견디었을까.
의문은 바닥에서 먼저 풀린다. 집안의 다른 무덤은 땅바닥 위에 돌을 쌓았지만 장군총은 거대한 석조로 된 바닥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콘크리트로 기초를 다져 놓은 셈이다. 이는 지금도 확인이 가능하다. 장군총 전체가 맨 밑돌에서 바깥으로 3, 4m 정도 돌바닥이 깔려 있다. 무덤을 지탱하는 데 엄청난 힘이 된다.
결정적인 것은 들여쌓기. 윗돌을 밑돌보다 안으로 들여쌓았다. 이 공법은 성 축조 방식에서 비롯됐다. 요녕(療寧)성 심양(瀋陽) 부근에 있는 백암(白巖)성. 성벽과 주요 방어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까지 원형을 상당부분 보존하고 있는 것은 들여쌓기를 했기 때문. 서길수(서경대) 교수는 "현재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 고구려 축조물들은 이 공법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밑돌의 윗면에 홈을 파 윗돌이 밖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흔히 건축가들 사이에 그랭이 공법으로 통한다.
건축 전문가들은 이런 축조방식을 동원하면 그냥 수직으로 쌓는 것보다 견고성이 5배이상 증가한다고 한다
수년간 집안 지역 고분을 집중 연구한 고구려 전문가 김삼(중국 연길 거주)씨는 "화강암을 겹으로 쌓아 외장력을 줄인 것이 장군총 장수 비결"이라고 진단한다. 다른 석실 고분은 바깥은 돌로 쌓고 안은 자갈과 흙을 채워 넣은데 비해 장군총은 외벽 안쪽 첫번째 칸까지 바깥 벽과 같은 화강암을 쌓아 외장력을 급격히 감소시킨 것이 붕괴를 막았다는 것이다.
이곳에 쓰인 돌은 1천500개. 길이가 4m가 넘는 돌을 어떻게 가져 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에는 현대처럼 대형 중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 학계에서는 장군총 서북쪽 16㎞ 지점에 있는 '우산'에서 가져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우산은 고구려 채석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지금도 우산에는 대형 화강암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돌 하나의 무게만 12~13t, 많이 나가는 것은 20t이 넘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산밑으로 운반했을까.
전문가들은 눈이 많이 오는 집안의 특성상 눈덮인 산 아래로 돌을 굴려 내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산 밑으로 내린 돌들은 둥근 나무들을 밑에 깔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장군총이 있는 장소로까지 옮겼왔다.
다음은 이 거대한 돌들을 아파트 4층 높이인 12m까지 들어 올리는 것이 문제. 물론 당시로서는 기중기나 크레인이 있었을리 없다. 낮은 계단은 여러 사람의 힘으로 돌을 들어 올렸으며 높은 층은 주변에 장군총이 쌓여지는 높이와 같은 간이 흙산을 만들어 경사를 완만하게 한 뒤 돌을 이곳으로 올리고, 다리를 만들어 다시 장군총으로 옮겨가 쌓는 방법을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22단을 만들었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건축술이 얼마나 정교하고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서길수 교수는 "장군총은 기술만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충분한 경제력과 강력한 권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 고구려의 위대함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11대 동천왕·12대 중천왕
고구려에는 돼지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제11대 동천왕(227~248년)도 이름이 '들돼지'라는 뜻을 가진 교체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국경을 맞대게 된 위나라를 먼저 공격했다가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당하고 자신은 남옥저로 피신하는 수난을 당한다. 이 때 밀우와 유유가 나타나 거짓 항복, 적장을 찔러 죽이고 수도를 회복한다. 왕이 죽자 이를 슬퍼해 따라 죽은 백성들이 많다는 기록도 있다.
12대 중천왕(248~270년)은 동천왕의 아들로 즉위한지 두달만에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들의 다툼 때문에 둘째 부인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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