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명관칼럼-격동의 시대를 바라보며

지난달 25일에 막을 내린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미국을 위한 '애국올림픽'이었고 세계의 반미감정에 부채질한 대회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입장식 때 미국 선수들은 작년 9월 11일 테러에 의해서 무너져 내린 세계무역센터빌딩의 폐허 속에서 건져낸, 찢어진 성조기를 앞세우고 입장했고 개회선언에서 부시 대통령은 '자부심이 강하고 감사의 뜻을 잊지 않는 미국국민을 대표해서'라고 말해서 빈축을 샀다.

제 나라를 사랑한다니 누가 그것을 나무라겠는가. 더욱이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간 사건이 일어난 후이니 그 갸륵한 심정을 누구도 마다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사건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처럼 그 애국주의가 방약무인의 오만과 무서운 배타주의를 뜻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고 미국 스스로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임은 두말할 것 없다.

그런데 애국주의에 열광하게 되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양식이나 이성은 흐려지고 마는 것 같다. 금년 미식 축구 전국대회에 있어서도 과도한 애국주의에 의한 이변이 일어났다고 한다. 약하기로 이름났던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뉴잉그랜드 팀이 기적적으로 우승을 거두었다.

그 팀이 미국에 처음 이민을 온 사람들을 찬양하면서 '패트리어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뜻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는 것이다. '패트리어트' 즉 애국자에게 요즘 같은 때에 어떻게 패배를 안겨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부시 대통령은 11월에 있을 중간선거를 의식해서 지난 5일 수입 철강에 대해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대미 철강 수출 60%가 휘청거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지만 유럽연합도 일본도 역시 비상이 걸렸다.

이것은 남의 나라에 대해서는 구조개혁과 시장개방을 강요하면서 자기네는 그것을 거부하려는 독선적인 태도라고 비난을 받는다.

자유무역의 이익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나라가 그것을 거부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하는 목소리가 미국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1월말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이라고 한 발언에 못잖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미국이 냉전이 끝난 후 누려왔던 이른바 미국 일극지배(一極支配)라는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9·11의 테러도 그러한 미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겠고 그 후 그런 상황이 한층 더 강화되는 듯하지만 그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힘의 질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요를 미국을 통해서 일별해 보았지만 우리 국내의 움직임도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울 만치 격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재정권 때는 선거란 요식 행위에 불과했고 다음 집권자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민주선거라고 하면 개표가 끝나야 아는 것이니까 앞날의 정치판도를 예상할 수가 없다. 대선을 향한 정치적 변동은 격동에 격동을 거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주당은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예비선거처럼 전국을 누비며 대통령 후보에 대한 당원과 국민의 여망을 묻는 데 여념이 없다. 한나라당의 총재로서 차기 집권을 넘보던 이회창씨는 105평 빌라사건과 자부의 하와이 출산 사건으로 뜻하지 않은 태풍을 맞고 있다. 또 한편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근혜씨의 움직임도 예측하기 어려운 폭발력을 내포한 것처럼 주목을 끌고 있다.

왜 이런 정치적 동요가 불가피한 것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변화를 열망하는 우리국민의 강력한 의지 때문인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렇다면 세계적 또는 국내적인 격동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어떤 이들은 왜 하필이면 마르크스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요즘 나는 26살 나이의

젊은 그가 '헤겔법철학비판서설'에서 한 말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는 낡은 세계가 지나가려고 할 때 마지막 단계는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밝게 즐겁게 그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서라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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