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선후보 TV합동 토론회를 보고

세 후보는 모두 연설에서 이구동성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무엇을 바꾸겠다는 것인가. 이회창 후보는 '정권'을 바꾸겠다고 한 반면 노무현 후보는'정치'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리고 권영길 후보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 대목이 어제 저녁에 있었던 첫 번째 TV 합동토론회의 가장 중요한관전 포인트였다. 이 후보는 김대중 정권의 과오를 시종일관 지적하면서 노 후보가 현 집권세력의 뒤를 잇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는 자신이 '부패한' 김대중 정권을 대체하는 세력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애를 썼다. 이 후보의 전략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김대중 정권 비판에 모으는 말하자면 '집중화'였다.

이에 비해 노 후보의 전략은 '포괄화'였다. 정치부패는 3김시대에 만연한 하나의 시대적 특성이며 여기에는 이 후보도 포함된다는 주장이다.이 후보를 낡은 정치세력으로 부각시키면서 노 후보 자신은 그것과 싸우는 개혁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진보세력의 면모를 유권자들에게 보여준 권 후보는 이번 토론회에서 가장 많이 '재미'를 보았다. 권 후보의 정치적 평가 잣대는 이상적이고 원칙적이었다.이 기준에 따르면 이, 노 후보는 모두 위선적 정치세력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권 후보의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권 후보의 전략은'근본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근본적 기준으로 이, 노 후보를 비판하면서 자신을 차별화했다.

정치개혁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이 오갔지만 현실 문제의 진단이나 해결 방도에 있어서 이 후보와 노 후보 사이에는 이렇다할 '노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책대안을 제시하는데 조금씩 다른 아이디어가 나오기는 했으나 그것은 노선의 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역주의해결, 도청의혹, 특검제, 검찰중립, 당 민주화, 부패척결 등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논쟁의 많은 부분은 이, 노 후보 사이의 '비방'으로 채워졌다. 이를테면 이 후보가 어떤 정치 문제에 대해 노 후보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면 노 후보는 이 후보가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느냐라고 반론을 하는 식이었다. 서로가 좋지 않은 관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열띤 논전이었다.

재미는 있지만 의미가 떨어지는 이, 노 후보의 입씨름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권 후보는 차별성 있는 정책 대안들을 차근차근 발표해나가는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이, 노 후보의 정치개혁 프로그램이 주로 엘리트 사이의 견제를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비해, 권 후보의 대안은시민들의 참여를 통하여 정치부패와 권력기관의 독직을 견제하는 것이다.

북 핵 문제를 포함한 대북, 통일정책에 대한 쟁점에는 보다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일차적으로 이, 노후보 사이에 큰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한반도 평화 모색에 대한 두 후보 사이의 논전은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콜트 리볼버 권총을 허리에 차고 윈체스터 장총을 손에 든 두 총잡이가 마주 서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총을 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한다. 한 총잡이는 "총을 던져 버리자.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자"고 말한다.

다른 한 총잡이는 "어깨동무를 먼저 하자. 그러면서 총을 내려놓자"고 외친다.평화를 위해 어느 총잡이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확인한 이 후보의 대북 정책 기조는 전자였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 후보는 말하자면 '북한이 군사노선을 버리고 평화정착에 협조하면 북한 경제 회생을 위한 대북 지원에 나서겠다'는 주장이었다. 총을 내려놓으면 어깨동무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 후보는 북한이 여전히 대남 적화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남북한의 교류는 상호주의가 필요하며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 정부의현금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사문제 해결에 교류협력을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 이 후보의 입장이다.

노 후보의 대북정책 기조는 후자였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총을 내려놓게 하겠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노 후보는 평소 '신뢰가 우선이며 경제협력은 장기적 투자로서 필요하다'는 평소의 주장을 이번 방송토론에서 재확인했다.

노 후보는 지금 대북지원을중단하게 되면 남북한 사이의 대화통로가 단절이 되고, 이런 상황에서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되면 우리는 대단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이 후보에게반론을 펼쳤다.

노 후보는 핵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주도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교류협력의 유지와 대북 핵 포기 설득을 '병행'하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후보와 노 후보의 정책은 국제정치 인식의 전통적 두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 후보는 힘의 우위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에 서있다. 노 후보의 관점은 상호의존과 신뢰가 평화의 조건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권 후보의 입장은 북핵 문제를 대화와 평화적 협상을 통해 처리해야 하는데 미국이 전향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과 미국이 동시에 어겼는데 북한만이 어긴 것으로 일방적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위험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 권 후보의 주장이다. 권 후보는북한도 핵 개발을 철회하고 미국도 북한에 핵으로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권 후보는 통일을 이루려면 남북 긴장 완화, 미국과 포괄적 평화협정체결이 중요하며 선도적 군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토론은 무엇보다 저질 색깔논쟁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공정성을 형식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후보자들이 정책대안을충분히 서로 토론하며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은 매번 느끼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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