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무현 시대- 어떤 길 걸어왔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빈농인 노판석(盧判石)씨와 이순례(李順禮)씨의 사이에 3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출생 당시 모친의 나이가 43세로 난산 끝에 낳았다고 한다. 노 당선자는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데다가 재주도 많아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작은 누나인 영옥씨는 "어머니가 늘 '무현이는 봉화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낳을 때 굉장한 꿈을 꿨다. 하지만 부정타니까 얘기는 하지 않겠다. 너희는 그게 이뤄지는 걸 볼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창시절과 연애담=김해 진영의 대창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가난으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명랑한 성격에 공부도 열심이었고 직선 전교회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노 당선자는 과거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또 악발이 기질이 있어 초등학교 당시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1등상을 놓치자 '편파적 심사'라며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기도 했다.

노 당선자는 1963년 진영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가정 형편때문에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한다. 입학당시 학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부산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적지 않은 방황을 한 끝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가난에 대한 일화는 그가 쓴 '노무현이 걸어온 길'에 비교적 자세히 적혀있다. 일부분을 발췌하면 "크레용을 사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꿀밤을 맞으며 꾸중을 듣던 일, 고등학교 3년간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하숙, 자취, 가정교사, 회사숙직실 등을 전전했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잘 곳이 없어 초겨울 어느 날 학교 교실에서 이틀을 자기도 했다. 밤새껏 이를 악물고 얼마나 떨었던지 다음날 이빨이 아파 온종일 밥을 한 숟갈도 먹을 수가 없었다".

당선자는 66년 10월 고졸 출신들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 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6년부터 시작은 했지만 실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쯤이었다고 한다. 그는 합격후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에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1년 뒤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변호사 개업을 하고 얼마 안됐을 때의 일화다. 한 중년여성이 사기 혐의로 남편이 구속됐다며 변호를 의뢰해 왔다. 수임료가 60만원이었는데 사실 합의만 되면 변론도 필요 없는 사건이었다.

속으로는 미안하고 얼굴도 화끈거렸지만 당시 사정이 급해 받은 돈을 이미 써버린 후였다. 결국 아주머니는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삽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가 나중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도 그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편, 노 당선자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한 뒤 1972년 상병으로 제대했으며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 고향 진영에서 같이 자랐던 권양숙 여사와 결혼했다.

노 당선자는 '고시계'에 게재한 합격수기에 연애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제대 뒤 고시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해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됐다.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 9월에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가 '수석합격'이란 표어를 내걸고 공부했다"

▨인권 변호사의 길로=전두환 정권 시절, 부산의 '부림사건'이 일어났다. 부림사건이란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다.

그는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학생 가족과 고문을 당한 학생들의 모습 등을 보면서 시국사건·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79년 부마항쟁 때도 세상사에 눈감았던 제가 이른바 '부림 사건'의 변호사 자리를 어설픈 호기심으로 떡하니 맡았다. 5공 시절인 1981년 10월, 우연히 당시 부산지역 최고의 인권변호사였던 김광일 변호사의 '대타'로 시작했던 길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당선자는 잘 나가던 조세전문가의 길을 접고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1987년 민주쟁취국민 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항쟁'의 주역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부산 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 불렀다. 그해 9월에는 대우조선의 이석규씨가 파업도중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을 변호하다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정치입문과 청문회 스타=노 당선자는 1988년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의 허삼수씨를 누르고 기성 정치권에 진입한다. 이후 국회 노동위 등에서 이해찬·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었으며 '5공 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에서 정주영·장세동씨를 상대로 한 증인신문을 통해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다. 1990년 1월의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에 반대한 그는 당시 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꼬마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된다. 이후 김대중 총재의 신민당과 야권통합운동을 전개, 마침내 두 당은 1991년 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 첫 대변인으로 발탁된다.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그는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도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

노 당선자는 1995년 6월27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에게 패배, 또다시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게다가 같은 해 새정치 국민회의가 창당되자 민주당에 잔류해 1996년 15대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 다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1997년 11월 '정권교체'를 위해 국민회의에 입당, 이듬해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하지만 16대 총선에서 지역갈등 해소를 위해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행을 결행한다. 단신으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그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패배,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그를 아끼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된다.

이후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격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국민경선과 후보 단일화=노 당선자는 지난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예상을 깬 그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민 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YS를 찾아가 시계를 내보이며 협조를 요청한 것이 빌미가 되면서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에 참패, 당내에서조차 후보사퇴론이 제기되는 등 자중지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고비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난관을 극복했다. 후보등록을 앞두고 정몽준 통합21 대표와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에서 정 대표를 누르며 신승, 단일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하지만 투표 시작 7시간을 앞두고 정 대표가 '지지철회'를 선언, 마지막 문턱에서 좌절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는 다시한번 역전에 역전을 거듭, 대권을 거머쥐었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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