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북아 허브도시 포항-(1)한국의 '작은 서울' 포항

갈대밭에 어우러져 갈매기가 한가로이 노닐던 인구 5만명의 어촌마을 포항은 포항 제철이 들어선 지 34년만에 인구 50만의 도시로 변신했다. 한국 근대화의 상징도 시이던 포항이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포항공대를 중심으로 한 첨단과학도 시, 영일만신항을 발판으로 한 동북아 물류의 중심도시, 그리고 동북아~유럽 횡단 철도의 종착역으로 다시 한번 거대한 변화를 꿈꾸고 있다. 21세기 한국, 나아가 동북아의 대표도시로 성장할 포항의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편집자

포항은 거칠다. 포항 관문에 자리잡은 해병대 초소에서 주눅이 들고나면 시커멓게 치솟은 포항제철의 굴뚝이 자못 위압감을 준다. 하지만 첫인상은 이쯤에서 잊는 게 좋다. 비릿한 바다내음이 묻어있는 경상도 사투리도 마찬가지. 처음엔 거북스 럽지만 한참 듣다보면 숙성된 과메기 맛처럼 정이 잘근잘근 배어난다.

소문을 듣고 새벽 죽도시장 어판장을 찾아간 외지인은 이 맛의 의미를 알게 된다. 곳곳에서 억센 사투리의 고함을 듣고 싸움판이 크게 벌어진 듯 착각하지만 이내 경상도 바닷사람들의 과장된 정(情) 내기임을 깨닫게 된다. 포항의 아침을 여는 죽도시장에서 20년째 좌판을 하고 있는 김임순(57)씨는 "포항에 살다보면 비릿한 바다냄새보다 사람사는 냄새가 더 짙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포항은 '작은 서울'로 불린다. 서울처럼 팔도(八道)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살기 때문. 호남 출신이 13%나 되고, 충청도.강원도 사람도 많다. 산업 화를 거치며 초고속 성장을 하다보니 외지에서 유입된 인구가 대부분이다. 전체 인구 52만명 중 포항 토박이는 30%도 안된다. 그나마 지난 95년 영일군이 포항시 에 통합되면서 높아진 비율이다. 이전에는 토박이 비율이 25%에 불과했다.

특히 인근 지역 인구가 많이 유입됐다. 의성.울진.청송.경주.영덕 등에서 일자리 를 찾아 옮겨왔다. 영덕의 경우 현지 거주자보다 영덕출신 포항시민이 훨씬 더 많 아졌다. 이현우 재포영덕향우회장은 "영덕군 인구가 4만9천여명인데 영덕에서 온 포항시민은 6만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포항은 그만큼 독특한 도시다.

외지사람이 많다보니 정서도 비교적 개방적이다. 학연의 뿌리가 다소 깊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낀다. 이는 최근 포항지역사회연구소의 설문조사 결 과에도 잘 나타난다. 설문 응답자의 75%는 '지연으로 인한 불이익 경험이 없었다' 고 말했고, 84% 정도는 '토착민과의 갈등이 없다'고 대답했다. 전라도니 충청도니 하는 출신성분을 따지기 앞서 포항시민으로 뿌리내려 한 축이 됐다는 뜻.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포항문화예술회관 입구. 그곳에선 '의리 향토'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포항 토박이들로 구성된 '포항향토청년회'가 세운 것으로 포항시민들의 성향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포항사람들은 '의리' 를 매우 중시한다.

그리고 다혈질적이다. 포항을 처음 방문한 외지인들은 시중에 서 흔히 얘기하는 '됐나, 안됐나?'는 말에 당혹감을 느낀다. 거래를 트는 과정이 나 대화를 하다 의기투합하면 '형, 동생 하자. 됐나, 안됐나?'라며 툭 내뱉는다.

협상을 벌일때도 '됐나, 안됐나'라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일쑤여서 혼란스 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 시쳇말로 죽이 맞으면 끝까지 가고, 아니면 서 로 피곤하니 일찍 끝내버리자는 뜻이다. 소설가 이대환(44)씨는 '포항기질'이라고 표현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다보니 살벌한 면도 있지만 포항시민들의 인정(人情)은 유 달리 끈끈하다. 포항에 근무하다 떠나간 많은 사람들, 특히 관료들은 포항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포항은 울고왔다 울고간다'는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

고 위 관리들이 포항에 발령나면 '시골에서 어떻게 생활할까'하며 울고 왔다가 막상 떠날 때는 포항민들의 의리와 인정을 못잊어 울었다는 얘기. 지금도 포항에서 근 무하다 떠난 많은 사람들이 재임시절 인연을 그대로 잇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항이 서울의 판박이로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다양한 정부기관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국정원.세관은 물론 바다를 곁에 둔 지리적 특성상 대구에는 없는 해양경찰청.해양수산청 등 정부 산하기관들이 골고루 있다. 서울~포항간 항 공노선이 비교적 돈되는 노선으로 분류되는 까닭은 포철이라는 거대 시장의 역할 도 크지만 포항에 자리잡은 정부기관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매주 한차례씩 업 무차 포항공항을 이용하는 서울의 박인한(47)씨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포스코 와 죽도시장 횟집골목을 보노라면 포항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포항은 잠재력이 무한한 도시다. 포항공대를 비롯해 포항산업과학연구원, 방사광 가속기에는 국내 최고의 과학인재들이 밀집해 있다. 포항산업의 한 축을 담당할 생명공학센터도 조만간 들어선다. 또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자력으로 테 크노파크를 준공시키는 등 첨단과학도시로의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 포항을 해양전진기지로 만들어 줄 영일만신항 개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 다. 영일만신항은 오는 2005년 개통 예정인 대구~포항간 고속도로와 발맞춰 포항 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대구~포항간 고속도로와 영일만신항 은 대구.구미.포항을 한단위의 경제블록으로 묶어 현재 지역별로 특성화된 섬유. 전자.철강 등의 단편적인 경제구조를 서로 보완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포항의 장기 전망도 밝다. 현재 한창 논의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노선도 포항에 서 출발한다. 이에 발맞춰 포항~삼척간 동해중부선 철도개설을 위한 전단계로 실 시설계가 시작돼 포항 사람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지역발전의 절대적인 인프라인 도로망도 사통팔달로 뚫린다.

대구~포항간 고속도로에 이어 포항~경주(건천)간 산업도로 개통도 눈앞에 두고 있다.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건설 계획도 추진 중이 다. 포항~군산, 포항~울산간 고속도로를 위한 타당성조사 예산이 확보돼 있다.

특히 포항의 교육은 전국을 넘보고 있다. 올해 치러진 대학수능시험에서 포항출신 고교생이 대구.경북 수석을 휩쓸었고, 각종 전국 규모 경시대회에서도 지역 학생 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교사들은 포항 교육이 이처럼 업그레이드된 배경으로 포스코를 우선 꼽는다.

80년대 초만 해도 포항에서 공부로 두각을 나타내는 중학 생들은 모두 대구.서울 등 대도시 고교로 유학갔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오히려 역류현상을 보이고 있다. 서울 일류대학 출신들이 포스코 및 관련 계열사 근무를 위해 속속 포항으로 왔고, 이들은 전국 어느 도시 못잖은 교육열을 보이며 포항의 교육여건을 바꿔나갔다.

포항지역 명문고 입학은 명문대 입학의 지름길이 란 인식을 심어줬다. 한 법조인은 "현재 수준이라면 포항은 머잖아 한때 전국에서 명성을 떨쳤던 경기고, 경북고만큼이나 많은 인재을 배출해 낼 것이 틀림 없다" 고 내다봤다.

작가 이대환씨는 "포스코가 위치한 곳은 경북 동해안에서 최고의 해수욕장이었다" 며 "포항 사람들은 쾌적한 자연환경을 잃었지만 대신에 세계 속의 기업을 가진 도 시로 성장한 만큼 엄격히 득실을 따지기가 쉽잖다"고 말했다.

전국의 새해 아침은 포항 호미곶에서 출발한다. 동해의 날쌘 파도가 하루 종일 하 얀 포말을 만들었다 지우는 이곳은 호랑이 꼬리로, 한반도의 정기를 품은채 포효 하고 있다.

한 해의 국가 번영을 기원하는 1월1일 해맞이 국가행사도 그래서 해마 다 이곳에서 열린다. 지난 천년과 새천년의 일출.일몰 불씨가 '영원의 불'로 보존 돼 역사적 가치를 더하며 포항사람들의 자긍심을 한 껏 키워주고 있다.

포항.최윤채기자 cy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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