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포럼-노무현 당선과 TK

조선말인 1881년 영남선비들은 만인소를 올렸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은 외세에 나라를 내주는 결과를 빚는다는 우국충정의 글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영남선비의 당당하고 순수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역사적 평가에서는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개국을 막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조선책략을 채용한 지배층도 결국 30년 뒤에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결과를 낳았음을 볼 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잘못된 건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121년 뒤인 2002년 12월 대구·경북(TK)은 대통령 선거에서 낡은 정치청산보다는 부패정권 심판이라는 정의의 길을 지지했다.

그러나 조금 더 많은 국민은 낡은 정치청산이라는 역사발전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또 한번 좌절을 맛본 것이다.

이번에도 영남은 시대 흐름을 잘못 읽은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보수성이라고 하는 걸까. 실정(失政)에다 비리가 많은 정권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역사의 정의이고 순리라고 믿었기에 영남인들은 잠 못 이루고 좌절감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 때와는 다르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의 쇄국은 청산되어야 할 가치였고 실제로 외면 받았지만 부패청산은 청산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고 실제로 새정권에 의해 선택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개혁파에서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DJ정권의 실정(失政)은 비판받아야 되고 부패는 규명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야당의 선택을 통해 이루려 했던 부패청산이 선택된 여당을 통해 이뤄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4천억원 북한 불법지원 의혹 등 각종 의혹들이 밝혀진다면 그리 애석해 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TK는 패배의식에만 젖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 당선자측은 새로운 정권의 성격을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이 아닌 새 정권의 출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83.2%도 김대중 정권의 재창출이 아니고 노무현 정권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중앙일보 조사). 이는 영남지역에서의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정서상으로는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지역의 정치기류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즉 영남지역에 뿌리깊었던 반DJ정서의 대상이었던 호남중심의 그 민주당이 이제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라졌다.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원초적인 '반(反)의 정서'인 반 노무현 정서는 원래 있었다기보다는 '노무현은 DJ 양자'라는 인식에 온 것 아닌가. 정권재창출이 아닌 새 정권의 선언은 바로 이를 부인하는 말이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명분상 재평가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당초 영남지역의 요구였던 DJ 실정과 부패에 대한 비판과 척결의 수준에 따라 재평가의 결과도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따라서 지금까지와 같은 바닥에 깔린 무조건적인 '반(反)의 정서'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당당하게 부패청산을 지지했듯이 당당하게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 했다고 할 때가 된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위원 25명중 10명이 영남출신이라는 것은 적어도 인사탕평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대통령 당선자의 '인사청탁 = 패가망신'이라는 경고도 하나의 희망을 가지게 한다.

제왕정치에서 시민정치로 우리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도 하나의 희망이다.

인터넷을 통해 국민의 국정참여, 열린 청와대를 위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 등의 시도 등이 그것이다.

야당대표와 회동의 정례화 등 대화와 타협의 정치 복원 등은 낡은 정치의 청산의 길인 것이다.

이래서인지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89%가 잘할 것 같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개혁에는 단점도 있겠지만 적어도 방향만은 잘 잡은 것 같다.

그러나 불안과 불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분야에서도 그렇고 북핵처리에서나 대미관계에서도 그렇다.

주5일제 등 분배위주의 배품의 경제와 성장잠재력 강화라는 시대적 필요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민족공조와 외세공조(한미공조)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마찰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민족자존심과 외교실리를 어떻게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지 국민은 궁금하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의 가벼움'도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아무튼 마음으로 변화를 보자. 잘했다면 박수를, 못 했다면 심판을 내릴 평가의 기회(내년 총선)도 있지 않은가.

아직도 지역신문의 홈페이지에는 몰표논란이 가끔씩 일고 있다.

영남의 68.6%는 지역감정이고 호남의 92.3%는 지역감정 타파라는 허파 뒤짚어 질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68.6%도 몰표는 몰표인 것을. 계속 해 봤자 오십보 후퇴한 사람이 백보 후퇴한 사람을 비웃었다는 오십보 백보(五十步百步)식 논쟁일 뿐이다.

이제 그만 하자. 그런데 누가 왜 영남의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서상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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