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산(億山)에서 뻗은 봉우리들이 차츰 낮은 구릉으로 변해 길게 내리닿은 곳. 청도군 금천면 신지1리. 동창천을 따라 아담하게 마을이 이루어진 이곳은 '섶마리'로도 불린다.
마을 한가운데엔 100여년된 고가 다섯채가 '떠억하니' 터를 잡고 있다.
밀양 박씨들이 세거해온 마을. 아직도 유풍(儒風)이 구석구석 스며있다.
이젠 당시의 부유함과 화려함은 사라지고 고즈넉한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신지리는 운문사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대구에서 팔조령을 지나 청도를 거쳐 운문사 방면으로 접어들거나, 경산에서 운문사쪽으로 가다보면 금천면에 닿는다.
금천면 소재지내 동곡한의원앞 두갈래길에서 987번 지방도를 이용, 동창천을 따라 1.3km정도 가다보면 금천교가 나오고 곧 옛정취가 서린 고택마을에 발길이 닿는다.
동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동창천(東倉川)을 두고 마을사람들은 비단내, 즉 금천(錦川)이라 부르기를 즐긴다.
넓은 시내가 휘돌아 나가며 곳곳에 용두소, 소요대와 같은 절승지를 만들었다.
선인이 유유자적할 만한 곳이라하여 선호(仙湖)라고도 하고 섶나무(물거리나무)가 울창해 섶마리, 섶말, 선마리 등으로도 불렸다.
이중 '섶마리'는 두가지 설이 있다.
선호 부근에 숲이 울창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밀양 박씨가 입촌하여 잡목숲인 섶을 벌채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몇년전만 해도 섶마리에는 88 가구에 232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지만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75 가구 200명이 채 안된다.
밀양 박씨가 50여 가구, 김해 김씨와 경주 이씨가 6, 7 가구, 나머지는 기타 성씨로 되어 있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청년들은 볼 수가 없고, 대부분 60, 70대 노인층이다.
주로 벼농사와 소규모의 감·복숭아 등 밭농사를 짓고 있다.
박순동(62) 이장은 "일부 주민들은 도회지에 있는 자식들에게 간뒤 가끔 고향에 내려올 정도"라며 취학아동을 못보고 산지 몇 해나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그나마 지난 해 일곱살짜리 주민 한 명이 늘어난 것은 도회지의 손자가 할머니집에서 생활해야 할 형편에 놓인 때문이라는 것. 박 이장은 "옛날엔 번성한 마을이었는데…"라며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신지리를 찾은 방문객들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마을허리를 쩍 갈라놓은 도로다.
일제시대때 맥을 끊는다며 일본인들이 마을을 두동강이로 잘라 길을 냈다.
게다가 지난 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때 또다시 2차선 포장도로로 확장, 고택의 일부분이 허물어지고 말끔한(?) 담벼락으로 치장됐다.
마을을 관통한 큰 길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가슴이 휑해진다.
신지리의 중심은 역시 다섯채의 고택들이다.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제106호)을 비롯, 섬암고택(문화재자료 제268호), 명중고택(문화재자료 제269호), 운남고택(문화재자료 270호), 도일고택(문화재자료271호). 현재 운강고택에는 선경당 박정주의 6세손 박성욱(63)씨가 관리하며 방문객들을 맞는다.
그는 수시로 찾아드는 고가연구가들과 대학생들에게 기꺼이 집안내력을 설명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간혹 문이 잠겨있는 경우도 있어 이곳을 방문하려면 박씨에게 미리 연락(016-519-3137)하는 것이 좋다.
운강고택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서있다.
1809년에 후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이 1824년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운강(雲岡) 박시묵 공은 옛집을 중건하고 금천가 벼랑에 별서(別墅) 만화정(萬和亭)을 지었다.
운강고택은 대지 1천700여평에 집채가 9동에 80칸이나 된다.
서까래의 뿌리에 닿도록 높이 걸린 '雲岡古宅'(운강고택)이라는 편액과 큼지막한 대문이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대문을 들어서자 너른 마당주위로 남향한 사랑채를 비롯, 중사랑채와 고방채, 행랑채가 ㅁ자로 배치돼 있다.
도일, 명중, 섬암, 운남고택 등도 모두 박씨들이 대를 이어온 고가들이다.
운강고택에서 분가한 탓에 규모나 짜임새가 그만은 못하지만 뿌리깊음을 내보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나름대로 특성이 있어 한국의 건축미를 대표할만한 고택들이다.
그러나 주인들의 발걸음이 끊기고 문이 굳게 잠긴 채 점차 퇴락을 거듭해 안타까움만 더해준다.
운강고택 주인 박성욱씨는 어쩌면 이 고택마을의 마지막 지킴이가 될지도 모른다.
"조상들의 숨결이 이어져 온 곳이지만 사실상 관리하기에 너무나 벅차다"며 한숨이다.
이곳에서 300여m 떨어진 금천 벼랑가의 만화정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이곳은 학문을 가르치던 정자였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동창천변의 피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하룻밤 머문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화려한 자태가 엿보이지만 쇠잔한 모습으로 퇴락해 가고 있다.
비단폭 같았다던 금천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운문댐에 막혀 바닥을 드러낸 채 가는 물줄기로 변해 버렸다.
코앞에는 시멘트 다리가 걸려 멀찌감치 내다보이는 선암서원의 풍광마저 가렸다.
늙은 벚나무가 주인행세를 하며 쓸쓸히 정자를 지키고 있고, 앞마당에는 300여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떡버드나무 몇그루가 노장군처럼 만화정을 경호하는 듯하다.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강기슭 멀찌감치에 선암서원이 있다.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향사하는 서원. 주변에 둘러선 수백년된 소나무들은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선암서원에서 금천을 끼고 내려오면 마을 안쪽 강변에 이름만큼이나 예쁜 하얀집 '목언예원(木言藝苑)'이 눈에 띈다.
화가이자 작가인 청도사람 민병도(전 한국미술협회 대구지회장)씨의 작업실이다.
처마에서 댕강댕강하는 풍경소리가 정겹다.
주변 풍광과 너무 잘 어울리는 화실 한켠에서 주인과 담소를 하며 차 한잔을 나누면 마주 쳐다보이는 어성산의 봉황애는 마치 거대한 병풍같고 자연을 내집 정원으로 옮겨온 듯한 착각이 인다.
이제 신지리는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택은 쇠락하고 새롭게 작가들의 보금자리로 태동하고 있다.
이홍섭기자 h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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