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해외 독립운동의 요람
하와이 이민 한인들은 고되고 눈물겨운 사탕수수 밭 노동생활 속에서 돌아갈 조국을 잃은 한스러운 고통을 함께 겪어야 했다.
한인들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국권상실이 무지에서 비롯됐다고 깨달았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자녀교육 열기로 나타나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글과 고국문화, 민족혼에 대한 교육이 활기를 띠었다.
여자 아이에 대한 교육도 소홀하지 않았다.
첫 이민 3년만인 1906년 교회의 지원과 기금모금을 통해 하와이정부 공인 6년제 초등학교인 한인소년기숙학교가 호놀룰루에 세워져 1918년까지 운영됐다.
이 학교는 중국인과 일본인도 갖지 못한 한인 자체 정규학교로 최초의 해외 한인교육기관이었으며, 이승만 박사가 여자기숙학교(1915~1918)와 한인기독학교(1918~1928)를 설립하는 기반이 됐다.
하와이대 최영호(72·역사학) 명예교수는 "1906~1910년 하와이 민족별 인구비례 공사립 한인학생 수는 중국·일본인에 비해 현저히 높았고 진학률도 월등했으며, 1907~1929년 하와이 여러 섬에 25개 한글학교가 존재했다"며 "한인들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민족교육에 힘써 하와이가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초기 이민자들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활발한 단체활동을 벌였다.
사탕수수 농장에 정착하자마자 캠프별 동회를 조직, 규율을 세우고 자체 경찰대를 만들어 마을질서와 친목을 유지했다.
1903년 설립된 신민회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한인 친목단체들이 오아후섬과 인근 섬들에 잇따라 생겨 서로 연락하며 교포사회를 하나로 묶어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조국이 비운을 맞자 항일단체로 성격을 바꾼다.
특히 1907년 9월 24개 애국단체 및 동회 대표자 30여명은 호놀룰루에 모여 5일간 마라톤 회의를 가진 끝에 모든 단체를 아우러는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기념사업회 이덕희(62·여) 하와이위원회 부회장은 "합성협회는 조국광복과 한인들의 안녕보장,교육장려 등을 이념으로 표방해 한인들이 정치적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시발점이 됐다"며 "1908년 3월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출신 장인환, 전명운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한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은 항일정신을 고조시켰다"고 설명했다.
이후 항일운동의 역량을 결집하는 통합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돼 1908년 10월 합성협회와 미주공립협회를 합친 국민회가 창립되고 2년 뒤 대한인국민회로 확대개편된다.
1912년 국민회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영입된 박용만은 1914년 독립운동에 자주적 물리력이 필요하다며 일제와 맞서 싸울 국민군단과 군관학교를 창설,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재미 한인단체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국민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끈 단체는 1921년 이승만 박사 등이 설립한 동지회. 이 단체는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여러 애국단체를 지원하는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동지회는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채권을 팔아 임정 재정의 60% 가량을 하와이에서 충당했다.
여기에 대한부인구제회 등 하와이 여성단체들이 주도적으로 참여,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돼 조국의 여성들보다 왕성한 광복운동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여학생 등 청소년 교육사업과 태평양잡지(태평양주보의 전신) 발간을 비롯, 정치 교육 종교 언론 등 다방면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으며 1919~1925년 임정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1940년 국민·동지회, 중한민중동맹단, 대한부인구제회 등이 망라된 연합회를 구성하고 다음해 미주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만들어 여성단체들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광복군 후원과 외교활동에 치중했다.
한인 청년 800여명은 태평양전쟁에 미군(장교 200여명)으로 참가, 일본군과 싸웠다.
이 과정에 당시 한국에서도 생소했던 한글신문들이 발간돼 고국소식을 전하며 독립정신을 심고 문맹퇴치와 대중교육에도 기여했다.
1904년 3월27일 창간된 하와이 최초의 한글신문인 신조(新朝)신문은 14개월간 격주로 발간되며 애국심을 고취했으며 독립신문 등 20여개 신문이 발행됐다.
독립운동이 이민생활의 전부다시피 했던 하와이 한인들의 조국애와 민족혼은 한국전 이후 고국구제와 장학사업으로 이어졌고 지난 98년 IMF 외환위기 때 달러보내기운동으로 나타났다.
최 교수는 "멀고도 낯선 땅, 하와이에 뿌린내린 한인들의 변함없는 나라사랑이 오늘의 번영된 한국과 자랑스런 재미 교포사회를 일구는데 일조했다"며 "앞으로도 재미교포의 애국애족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호놀룰루=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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