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아시아 자존심'의 퇴장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과 스페인간 8강전 경기가 벌어진 지난해 6월 22일 저녁. 연장전 끝 승부차기로 한국이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그 시각에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의 전격 사임 소식이 외신을 탔다.

마하티르 총리는 이 날 집권당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 전당대회 도중 모든 공직과 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외신은 "그는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스페인 축구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임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81년 총리직에 오른 이후 20년 넘게 카리스마적 지배를 해온 그의 은퇴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1시간만에 그것은 오보(誤報)가 돼버렸다.

사임 발표가 나오자 압둘라 바다위 부총리와 주요 당직자들이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마하티르는 미처 발표문을 다 읽지도 못한 상태에서 단상을 내려왔으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다위 부총리는 "총리가 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임을 번복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며칠후 이 오보는 다시 사실로 바뀌었다.

그는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 밀려 사임 결정을 번복했으나 후계자 승계작업이 확고해질 때까지만 집권을 연장키로 합의, 정계 은퇴 의사가 틀림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올해 그의 나이 77세지만 말레이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총리, 마하티르는 이렇게 퇴장도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최근에는 정적을 투옥하는 등 반대 세력에 부대끼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마하티르 없는 말레이시아'는 아직 불안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하티르의 매력은 '비전 추구'에 있다.

그는 총리가 된 후 말레이시아를 고무·주석 원료 수출국으로부터 전기제품과 철강 자동차를 생산하는 '아시아의 호랑이'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2020년까지 말레이시아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린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특히 '아시아 가치'를 중심으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그의 목표는 지금 세계적인 화두가 되었다.

그는 97년 외환위기 때도 IMF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시아적 가치로 위기를 벗어났다.

▲마하티르 총리가 "오는 10월 말 반드시 퇴임하겠다"고 8일 또 밝혔다.

서구의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마당에 도덕적 가치를 분연히 외친 그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아시아의 자존심이었다.

서구의 합리적 '개인주의'가 아닌 어른과 권위를 존경하고 자기희생과 헌신을 아는 동양의 '가족·공동체 중심주의'는 지방분권과 맞물려 지금 21세기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집중 연구되고 있음은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퇴장이 아시아적 가치의 퇴색으로 이어질까 두렵다.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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