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보이차에 관한 단상

예전 우리나라에서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듯이, 중국 운남성에서는 딸을 낳으면 미리 혼수품으로 차를 만들어 저장했다.

약이 흔하지 않은 변방에서 이 차는 만병을 다스리는 약으로 생활필수품에 속했을 것이다.

이 차가 바로 그 약성과 효능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는 보이차이다.

우리의 녹차와 차례에만 익숙해있던 내가 중국 황제에게 진상했다는 보이차를 처음 맛본 것은 바로 얼마 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비오는 저녁의 운치를 즐긴다고 어둑어둑할 무렵 아내와 함께 수목원을 산책했다.

비에 젖은 식물들이 내뿜는 향기를 즐기며 걷다보니 발이 온통 젖어버렸고, 눅눅해진 발을 말린다고 우연히 들른 곳이 수목원 앞의 중국 찻집이었다.

이미 보이차를 즐겨하던 아내가 나에게 보이차를 권했다.

아내는 제법 숙달된 손맵시로 보이차를 우려 등황색의 차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첫 맛에서는 흙내음을 느꼈다.

다만 초의선사가 우리나라의 격조높은 차생활을 노래한 '동다송'에서 말했듯이, 단둘이 차를 마시는 수승한 분위기에 찻물 끓이는 소리가 더해져 차향이 훨씬 향기롭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런데 우연히 맛본 보이차의 진면목을 단시일 내에 깨우칠 좋은 기회가 잇달아 생겼다.

중국 산둥성 출장길에 중국 다예의 원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선생은 여러 중국명차를 제쳐놓고 곰삭은 낙엽색의 보이차를 두 손으로 잘라 다호에 넣고는 종이에 '진차(陳茶)'라고 써보여주었다.

오래 묵은 차라는 뜻이었다.

달착지근한 맛과 깊은 향이 혀에 감기면서 뱃속이 훈훈해지는 것이, 몇 잔 받아마시는 새에 어느덧 질긴 여독이 풀리는 것이었다.

기를 보한다는 보이차의 작용이 즉각 느껴지는 듯 했다.

차는 생활성과 정신성이 동전 앞뒤면처럼 밀착되어 있는 오묘한 음료이다.

약리적 성분이나 정서적 필요에서 마시는 차가 어느덧 탈속의 경지까지 넘나드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잔의 차는 곧 참선의 시작'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상히 가야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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