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황진이, 21세기로 보내는 편지

황진이는 미인이며 시문에 능한 송도기생이다.

여러 남자를 웃기고 울렸다.

그러나 모든 개인의 삶이 그렇듯 황진이의 삶도 남녀문제로 한정할 경우 단순한 '기생 이야기'로 끝난다.

황진이는 가정의 틀에서 벗어난 신분인 기생이었다

게다가 소위 '잘 나가는 기생'에게 보장되는 안락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했다.

당시 최고의 학자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오래 공부했다.

남녀간의 애정만으로 삶의 공허함을 메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분사회에 대한 분노, 시와 음률에 대한 열망, 어머니에 대한 효, 전국 유람으로 나타난 방랑…. 황진이의 문학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 속에 고뇌와 방황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학생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제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제 생각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얼마 전 오랜만에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천포창(天疱瘡,매독)에 걸린 어머니의 몸은 끔찍했습니다.

콧등이 내려앉아 콧구멍이 들리고 왼쪽 눈두덩은 짓물러 고름이 흘렀습니다.

등에 욕창이 심해 천장을 보고 누울 수 없었고 발목은 부러져 마루에서 내려 설 수 없었지요.

어머니는 저보고 한사코 한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딸인 저에게조차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제가 찾았을 때 어머니는 조용히 삶의 흔적을 지우고 계셨습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외숙부도 어머니를 위해 많은 처방을 가져왔습니다

으름덩굴과 만초를 달여 먹이고 들국화와 대추나무 뿌리로 짓무른 상처를 씻었습니다.

경분(輕粉, 염화제일수은-한방에서 쓰는 매독이나 피부병 치료제) 먹은 오리를 삶아 먹이고 황주(黃酒)를 하루 세 차례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병세는 오히려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외숙부도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단정한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맑은 가야금 소리처럼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다고 했습니다.

가야금이라면 송도 제일가는 진현금이 천포창에 걸려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문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천포창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았더라면,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때로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지켜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과 마주 선 사람을 위로하기에 나의 피는 너무 뜨거웠습니다.

이 해괴망측한 병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왔다면, 다시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천포창 정도는 별 것도 아닌 병이라고요? 이 편지를 읽는 21세기에는 그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1세기라고 해서 사람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질병이 없는 것은 아닐 테지요. 어떤 시대에나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은 있을 것입니다.

내 전부를 쏟아 부었지요. 천포창에 효험이 있다는 풍문만 들리면 집 팔고 땅 팔고 노래 팔고 웃음 팔아서라도 약을 구해왔어요. 너무 억울했으니까요. 눈 멀고 사랑 잃은 여자를 저렇게 죽이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참되고 부지런하게 선업을 쌓은 이가 불쌍하게 사라지는 것이 하늘의 법도라면, 그런 법도는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기대와 달리 어머니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죽음과 마주 섰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죽음과 마주서기 전에 어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닐까요. '부모가 계시거늘 멀리 놀지 아니하며 놀되 반드시 있는 곳을 밝혀두어 한다'는 논어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 흥에 겨워 이곳저곳을 유람하느라 그 말씀을 잠시 잊었더니 하늘이 큰 벌을 내렸습니다.

이 죄를 어찌 씻을까요. 저는 늦기 전에 어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했어야 합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참고자료:국립 중앙도서관.국가지식정보통합검색 시스템.한국역사연구회.역사신문.황진이(이태준), 나 황진이(김탁환),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황진이, 21세기로 보내는 편지'는 가상의 편지입니다.

그러나 천포창에 걸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실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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